[보스턴에서]셰이머스 하니 '베오울프'

  • 입력 2000년 4월 7일 20시 03분


뉴 밀레니엄 초, 영어권 출판 시장에서 시집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문제의 작품은 천년전에 쓰여진 걸작 ‘베오울프’. 노벨문학상 수상시인 셰이머스 히니가 현대영어로 번역했다. 히니가 노벨상을 수상했을 때도 그의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지는 않았다.

7세기와 10세기 사이에 쓰인 걸로 알려진 ‘베오울프’는 영어로 된 가장 오래된 영웅서사시다. 스토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반부는 덴마크의 야외 홀 히어롯에서 시작된다. 12년간 괴물 그렌델에게 사람을 바쳐 수심에 찬 덴마크 왕에게 스웨덴 기트족의 젊은 왕자 베오울프가 나타나 괴물을 해치우겠노라고 장담한다. 베오울프와 맞붙은 괴물 그렌델은 치명상을 입고 베오울프의 억센 손아귀에 잡힌 한쪽 팔을 스스로 자르고 도망친다. 이튿날 괴물의 어미가 아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잠든 사람을 죽이자 베오울프는 괴물의 동굴로 가서 어미를 죽이고 그렌델의 시체에서 머리를 잘라 온다.

후반부는 베오울프가 스웨덴의 왕이 되는 데서 시작된다. 50년간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리는 어느해, 불을 내뿜는 용이 나타나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용맹하지만 나이가 든 베오울프는 옛날 같지가 않다.

길고도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싸움 끝에 베오울프는 용을 죽이지만 자신도 치명상을 입는다. 결국 베오울프는 죽고 이야기는 베오울프의 성대한 장례식으로 끝난다.

그런데 왜, 벌써 65가지나 현대어 판본이 나와 있고, 대학의 고전문학 강좌에서나 강의되는 ‘베오울프’가 화제일까. 영국을 정복했던 북구인들이 영국에 남긴 신화를 영국에 정복당한 아일랜드 시인이 번역해서일까. 실제로 히니는 서문에서 자신의 번역은 잉글랜드가 아닌 아일랜드 사람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반지의 군주’의 저자 J R 톨킨이 “암흑의 힘과 싸워야 하는 인간 운명을 깊이 있게 묘사한 걸작”이라고 평한 원작의 힘이 탁월한 시인에 의해 살아있는 육체를 얻었다는 게 중평이다. 지구적 규모의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어가는 이 시대의 문화가 신화의 근원적 상상력을 부르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뉴 밀레니엄의 독자들은 천년전의 신화적 팬터지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사는 인간의 마음 속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영준(하버드대 동아시아학과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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