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정치와 문화민주주의' 위기의 한국政治 대안은 무엇?

  • 입력 2000년 3월 24일 19시 33분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했듯이 인간은 정치적 존재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인간은 함께 살 준비도 연습도 돼 있지 않은 세계에서 정치적 삶을 영위해야 하는 역설적 운명의 존재이기도 하다. 하이데거의 ‘세계(Welt)’라는 말이나 마키아벨리의 ‘행운(Fortuna)’이라는 말에는 사전에 준비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주어진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는 뜻이 함축돼 있다.

미리 살 준비를 갖추지 않은 세계-사람들은 이것을 흔히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세계에 비유한다-에서 이뤄지는 정치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양상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정치의 ‘희극화’다. 즉 거짓의 정치다. 다시 말하면 준비돼 있다고 위장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비극의 정치다. 행동의 결과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특정한 정치노선을 선택하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21세기 정치문화에 관한 철학적 성찰’이란 부제의 이 책은 필자에게 정치의 희극화에 대한 한 철학도의 ‘구토’에 가까운 독백처럼 느껴진다.

먼저 ‘머리말’에서 저자인 이교수는 이렇게 절규한다. “위기는 정치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가 오히려 위기를 부르고 있다.” 이어서 저자는 김영삼 전 정권의 문제부터 따져보자고 제안한다. 그에 의하면 김영삼 정권의 가장 큰 과오는 그처럼 요란스럽게 공언했던 ‘한국병’ 치료의 실패로 압축된다.

이교수에 따르면 한국병의 근원은 유교적 연고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유교적 경제윤리’는 한국 근대화의 원동력이 됐지만, 동시에 한국병의 온상이기도 했다. 물론 이 교수는 ‘유교적 사고방식’도 “모방을 통한 산업화가 일단 시작되면 경제발전을 가속화시킨다”는 적극적 측면을 인정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유교교육을 받은 양반세력’만이 관직을 배타적으로 독점했던 조선시대의 맥락에서 볼 때, 이른바 ‘유교주의’-유가사상의 왜곡된 형태로서의 유교주의-란 ‘교육-권력-소유’의 배타적 권력구조를 형성시킨 지배이데올로기였다. 뿐만 아니라 김영삼 문민정권을 포함한 한국의 현대화 과정은 이러한 권력의 배타적 순환구조를 전혀 해체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더욱 심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는 오늘날의 ‘지역갈등’의 뿌리도 ‘유교적 연고주의’에 있다고 본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유교적 연고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배타적 권력구조’의 파생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교적 연고주의는 오늘날 한국의 이른바 ‘권력정치’의 근간이 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어찌 그뿐이랴! “유교적 연고주의에 기인하는 한국병은 지역갈등이라는 외상(外傷)외에도 창의성 억압이라는 내상(內傷)을 유발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가 특히 우려하는 것은 공적 영역의 사사화(私事化)다. “유가철학은 인간이 도덕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을 탐구하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실현되는 형식과 양식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유가의 정치철학은 자율보다는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계중심적 인간관은 결국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구별을 배제하고 또 개인 상호간의 권력관계를 견제하고 비판할 수 있는 사회적 기제보다는 개인의 덕성을 중요시함으로써 통치자의 자의적인 인치의 가능성을 열어놓게 된다.”

이와 반대로 서양의 정치사상은 삶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는 필연성의 영역인 가정(家庭·Oikos)과,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 상호간의 논의를 통해 공동선을 실현하는 자유의 영역인 국가(Polis) 또는 공적 영역(Res Publica 즉 Public Realm)을 구분한다. 그러나 유가적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덕치사상은 …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구별하지 않는다. ‘대학’에 의하면 “군자는 집을 나가지 않고도 국가를 교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오늘날의 대안은 무엇인가? 이 교수는 ‘이성의 정치’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이성의 정치’란 무엇보다도 ‘이성적으로 논의’하는 정치를 뜻한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권력만을 추구하는 ‘권력정치’와 대립한다. 따지고 보면 ‘권력정치’의 본질은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연장선상에 자리잡고 있는 ‘가정(Oikos)’에 속한 활동이다. 반면에 이성의 정치는 ‘자유롭고 평등한 모든 시민들에게 정치와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는’ 말하자면 ‘공생주의(共生主義)’ 또는 ‘공화주의’의 정치를 지향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성정치는 책임을 위한 투쟁이지 결코 권력을 위한 투쟁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진우 교수의 ‘이성의 정치’는 한국에 있어서 새로운 공화주의의 담론을 열기 위한 화두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 가지 사족을 붙인다면 공동체주의도 공화주의로 고양될 때에만 비로소 그 본래의 정치적 의미를 획득한다는 점이다. 이 교수의 저작은 ‘민주주의’로 집중 편향됐던 기존의 논의들을 공적영역과 결부된 ‘민주공화주의’ 담론으로 전환 확장하는 데 주요한 기폭제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367쪽 2만원.

김홍우(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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