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일하는 여성의 당당함…그 뒤엔 엄마의 헌신

  • 입력 2000년 3월 13일 19시 25분


“엄마. 아주머니 한분이 또 안나오셨어. 빨리 와줘.”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사는 이희중씨(55)는 며칠전 딸의 전화를 받고 딸의 직장으로 ‘출근’해야 했다. 영양사인 딸은 캐터링업체에서 관리책임까지 맡고 있는데 조리담당 아주머니가 예고없이 결근하자 다급한 목소리로 구원을 요청한 것. 남편 출근 뒤 이웃집에 사는 친구와 차 한잔하려는 참이었다.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자 친구는 말했다. “나도 가끔 직장에 다니는 딸에게 비슷한 전화를 받아. 숨넘어가는 소리로 부르지. ‘엄마, 출근해야 하는데 애보는 아줌마가 안오셨어, 빨리 와줘.’”

이씨의 딸 손수정씨(29)는 “무슨 일이 있을 땐 엄마가 제일 먼저 생각나고 또 편하니까 도움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이씨는 “대학 졸업시키면 끝나려니 했는데 시도때도 없이 ‘엄마 엄마’ 외친다”며 “결혼후엔 딸이 집에 들어 앉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저도 행복하고 나도 편할테니까”했다.

그러나 일을 가진 엄마일수록 딸이 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길 원한다. 초등학교에서 컴퓨터를 가르치는 성진아씨(29·경기 이천시)는 자신의 일에 만족하며 결혼 후에도 일을 할 거라고 말한다. “엄마도 제가 일하는 걸 원하시구요.”

‘일하는 엄마가 좋은 엄마다’의 저자 레기네 슈나이더도 여러 논문들을 토대로 “사회적 편견과는 달리 일하는 엄마의 자녀들, 특히 딸들은 엄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으며 좀더 똑똑하고 개방적이며 호기심이 많아 성적이 높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1993년부터 매년 봄 미즈여성재단 주최로 ‘직장에 딸 데려 오는 날’행사를 벌이고 있다. 9∼15세 소녀들에게 사회적 성취욕을 불어넣기 위해 엄마의 일터를 보여주자는 취지다.

엄마의 일이 전문직이 아니라 해도, 딸은 엄마가 일에서 기쁨을 느낀다고 생각할까?

성씨는 그렇다고 말한다. “결혼 후 뒤늦게 대학을 졸업한 엄마는 가게를 운영하셨어요. 가게가 한번도 잘된 적이 없는데 엄만 일을 즐기셨어요. 가족 외에 엄마만 아는 사람이 생기고, 거기에 엄마만의 세계가 있다고 믿으셨나 봐요.”

딸이 일을 갖기를 원하는 엄마는 딸이 결혼한 뒤까지 뒤치다꺼리에 나선다. 3개월된 아이를 대구에 사는 친정엄마에게 맡긴 대학강사 서지원씨(29·인천 부평구 부평동)는 “엄마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의 일과 성공으로부터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엄만 아기가 오줌이라도 싸면 ‘축축하지. 엄마가 기저귀 갈아줄께’하세요. 아직도 외할머니로 적응을 못하는 거죠. 저는 8월 미국으로 유학해 박사학위를 받은 뒤 대학교수나 연구원이 됐으면 좋겠어요. 애를 봐주시는 엄마에게 미안하지만…”

교사가 꿈이었다는 엄마 김유옥씨(53)는 “딸이 공부하겠다고 아둥바둥하는데 어떻게 도와주지 않을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편안히 사는 것도 좋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일에서 보람을 얻는다면 그것이 딸애의 행복이고 나의 기쁨”이라는 것이다.

‘사위에게 주는 요리책’을 써서 페미니스트임을 공인받은 박형옥씨(63·서울 동작구 상도동) 에 대해 정작 딸 이은경씨(36·여성신문 편집부장)는 “직장 다니는 딸이 퇴근 후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 ‘음식방’을 만들 것을 계획할 정도로 희생적”이라고 평한다.

“엄만 엄마와 딸의 관계도 인간관계니까 한쪽의 희생이 계속되면 나빠질 수 밖에 없다고 하세요. 그러나 저 역시 사회생활을 위해 이기적이란 소릴 들을 만큼 엄마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어요.”

친정엄마의 희생 없이는 여자의 사회생활이 힘든 나라, 엄마의 이루지못한 꿈과 딸의 현재진행형 열망이 맞물린 상황에서는 이렇게 절충적이고 혼란스러운 ‘공리주의적 방식’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김진경기자>kjk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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