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님… 우리 대리님…" 인력시장서 '몸값' 치솟아

  • 입력 2000년 2월 22일 10시 47분


삼성물산 인터넷신규사업팀 경매부의 신일곤대리 (32)는팀원 20 여명에 대한 인사고과권을 가진 팀장이 다. 4 월이면 과장 2 명이 그의 팀원으로 들어온다. 월 60 만원의 경비, 프로젝트 당 1 5 억원씩 지출할 수 있는 투자개발비 집행권도 있다. 모든 기획안은 그의 결재를 받아서 이사에게 제출된다. 입사 7년 3 개월차.

디스커버리 벤처스의 김정국팀장(31). 입사 5년차 대리로 대기업 전자상거래사업팀에서 일하던 지난해 12월. 그가 사표를 던지자 인사팀에는 비상이 걸렸다. 김대리가 하던 일을 당장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해서는 과장 한명과 대리두명이 필요했다.

▼ 슈퍼대리 전성시대 ▼

대리가 뜨고 있다.

'당장 돈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조직이 개편되면서 인터넷사업에 비중을 두거나 기존 사업을 전사상거래로 돌리는 대기업과 중소 벤처기업에서 입사 3 ∼7 년차 대리급에 대한 의존도가 크게 높아졌다.

'판세'를 훤히 들여다보는 현장감각을 지녔지만 아직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았고, 컴퓨터와 외국어능력은 중년의 과장급 이상보다 뛰어나며, '머리'가 굳지 않아 창의력은 살아있되 실무경험에 비춰 당장 실현 가능한 아이디어만 쑥쑥 내 놓은 '이쁜 돈덩어리들'.

▼ 1990년대의 풍경 ▼

1996 년어느날 H 상사 회의실. 매일 매출점검회의를 하는 자리에박모씨(26)가 마지막으로 앉는다. 그가 준비한 각종 자료를 들춰

보며 부장 과장들의 발언이 이어진다. 박씨를 비롯한 사원과 대리들은 고개를 떨구고 앉아있다. 그 때만 해도 모든 아이디어는 과장에게서 나왔고 누가 과장으로 오느냐에 따라 부서의 실적이 좌우됐다. 직원들은 '담임선생님'(과장)눈치만 잘 보면 만사 O

K. 국제통화기금 (IMF)관리체제를 거치면서 기업의 체질이 실적본위, 디지털화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 2000년대는 다르다 ▼

한솔엠닷컴에서는 인터넷기획팀 E 비즈니스전략팀 등 각 부서의 대리 20여명이 한달에 한번 '주무회의'를 갖는다. 대리시각에서 함께 정보를 나누고 각 부서에서 새로 나온 아이디어, 고충사항

등을 종합해 경영진에 직접 보고한다.

한 달 전에 시작한 '사내벤처제도'는 대리들이 뛰어놀 무대를 만들어주기 위한 것. 그들이 실무능력과 창의성을 1 20%발휘할 수 있도록 '사장'을 시켜주는 것이다. 사원-대리-과장-부장-이사 순의 의사 전달 과정을 거쳤더라면 1만8000원 정액제 '틴틴 요금'은 경쟁사의 1만9000원짜리 '캡틴 요금'보다 늦게 나왔을 것임을 한솔엠닷컴 경영진은 잘 알고 있다.

▼ 주가는 상한가 ▼

인력시장에서도 대리의 주가는 상한가다. 헤드헌팅업체 유니코서치에 따르면 3, 4년전만 해도 헤드헌터들이 주로 취급했던 '상품'은 전문경영인들. 최소한 부장급 이상으로 당장 회사를 맡아 경영할 수 있는 30대 후반, 40대 '감독급'이 많았다. 대리급 '선수'들이 이력서를 들고 오면 고개부터 저었다.

그러나 요즘은 경력 3∼7년차의 인력들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다. 이 회사 이영미주임. "요즘 들어오는 '오퍼'의 30%이상이 대리 연조를 원하고 있어 그들의 몸값도 기하급수적으로 뛰고 있다."

요즘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 대리들은 주로 벤처기업의 팀장급으로 가거나 일부는 최고경영자 (CEO)로 변신하기도 한다. 업체들이 제시하는 평균 연봉은 스톡옵션을 빼고도 4000만원선. 김정국씨가 대기업을 떠날 당시 그에게 손짓을 한 회사는 10곳이었으며 그들이 제시한 연봉은 스톡옵션 제외하고 5000만∼1억원이

었다.

▼ 20/80의 그늘 ▼

이제 대리가 된 H 상사 박씨(30)는 요즘 사람을 만날 때마다 "피곤해 죽겠다"고 첫인사를 한다.

업무중심으로 조직이 개편되면서 관리자로서의 과장이 사라지고 관리 업무의 상당부분이 대리에게 떨어졌다. 새 아이디어를 내면 '뱉은 자가 쓸어담기' 원칙에 따라 일은 더욱 늘어나기 일쑤. 신입사원 공급이 끊기면서 말단이 하던 단순업무까지도 맡게 됐다.

그러나 인사적체가 심해져 언제 승진할지 모른다. 부익부 빈익빈, 잘나가는 20%의 대리는 황금기를 구가하지만 평범한 80%의대리들은 온갖 뒤치다꺼리를 하는 셈이다.

박대리는 "요즘 같으면 차라리 회사를 하나 차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 한다"고 푸념. 하지만 그는 안다. 회사가 언제 그를 팀장자리에 앉힐지 모른다는 것을.

<나성엽 기자> news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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