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6th 밀레니엄]1천년전 '고려의 힘'은 다원주의

  • 입력 1999년 12월 7일 18시 29분


《초읽기에 들어간 세번째 밀레니엄. 서기 2000년은 단기 4333년. 기원전 2333년에 단군 조선이 개국했기 때문이다. 그 옛날 서기를 사용했던 것은 아니지만, 단기로 따져보면 서기 2000년은 6번째 밀레니엄. 그 ‘유구한 역사’에서 한민족은 각 밀레니엄 전환기를 어떻게 보냈을까. 그 밀레니엄의 흔적을 통해 새 밀레니엄 전야를 들여다 본다.》

1000년 전인 999년. 고려 제7대 목종 2년. 고려 건국 82년, 후삼국 통일 64년.

한반도 통일 왕조인 고려. 새 밀레니엄 전야는 어떠했을까.

999년, 고려는 왜인의 귀화를 허용했다. 1000년 후인 지금도 우리는 외국인에 대해 폐쇄적인데 당시에 이미 왜인의 귀화를 허용했다니. 다양성 개방성 국제화를 끌어 안았던 999년 고려인의 이같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불안한 새 밀레니엄 전야〓1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목종. 기다렸다는 듯 목종의 어머니 헌애왕후는 섭정을 실시한다. 헌애왕후는 정부(情夫)를 불러들여 정사(政事)를 마음대로 주무른다. 나름대로 개혁정치를 실시하려던 목종은 좌절을 느끼고 남색(동성애)에 빠져 정치에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혼탁한 고려 왕실.게다가 동북아시아의 주도권을 놓고 거란과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건국 이후 100년도 못되어 찾아온 위기. 1000년전 고려의 밀레니엄 전야는 이처럼 불안했다.

▽중세로 가는 문〓왕실은 혼탁했지만 사회는 건실했다. 고려 사회 전반은 위기를 잘 극복해 나가면서 밀레니엄의 경계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제6대 성종은 국립도서관 수서원 설치(990), 국립종합대학인 국자감 설치(992)를 통해 세련된 문치주의의 기틀을 만들었다. 중앙관리들에게 매달 시부(詩賦)를 지어 바치도록 하는 문신월과법을 시행(995)했고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정책이 다각도로 진행됐다. 성종은 우리나라 최초의 금속화폐인 건원중보를 주조(996)했고 목종은 즉위하면서 토지제도를 개선했다. 이것이 안정된 중세의 기틀이 된 것이었다.

▽999년 고려의 힘, 다양성의 조화〓고려는 지방 호족들이 주축이 된 왕조였다. 이는 지방 호족들의 세력 다툼으로 언제든지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는 이 무렵부터 지방 호족을 중앙 관료로 흡수해 다양한 정치집단을 만들어 정치의 견제와 균형을 도모했다. 또한 청자와 불화(佛畵)로 대변되는 고급문화와 거대한 불상과 민간 신앙 등 지방 문화의 조화를 모색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인적 문화적 자원을 흡수한 통일왕조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 다양한 문화를 배척하지 않고 끌어들인 자신감. 999년 왜인의 귀화를 허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박종기 국민대교수(고려사)의 설명. “990년대는 고려 성종대에 이룩한 유교정치 문치주의의 바탕 위에서 왕실의 불안과 호족의 저항을 제어하면서 고려적인 질서, 중세의 면모를 형성해가던 시기였다.

이것은 지역 계층 문화의 다양성을 끌어안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자신감 덕분이다.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1000년전 고려의 힘은 다원주의였다. 다양성 개방성, 그리고 국제화를 지향했던 문화….

고려의 사신과 중국 송나라의 사신의 격이 상호 예우 등에서 동등했던 것도 이때부터였고, 세계 최고의 도자기로 평가받는 고려청자가 본격적으로 제작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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