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史實위해 임금과도 맞선 '곧은 붓'

  • 입력 1999년 11월 12일 18시 29분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 박홍갑 지음/가람기획 펴냄▼

사냥을 나갔던 조선 태종이 실수로 말에서 떨어졌다. 몸을 추스리면서 그가 맨처음 내뱉은 말. “이 일을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연산군의 고백. “내가 두려운 것은 오직 사관 뿐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 사관(史官). 춘추관의 9품 말단 벼슬아치였지만 국왕까지 두려워했던 존재. 이 책은 붓 한자루에 목숨을 걸었던 조선시대 사관들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사관들의 삶, 사관들이 기록한 사초(史草)의 역사적 의미, 사관과 국왕 대신들간의 갈등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져 있다. 당시의 사료를 구체적으로 인용해 독자들에게 현장감을 전해준다. 저자는 국사편찬위원회연구원.

이 책에서 돋보이는 것은 사관들의 순결한 삶과 정신.

태종 때 사관 민인생은 태종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태종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기록하기 위함이었다. 태종은 불만이 가득했다. 자신의 처소에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물러설 민인생이 아니었다. 민인생은 강경하게 맞섰다.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 얼마후, 민인생은 귀양갔다.

오직 역사의 진실 하나를 위해 국왕과 당당히 맞섰고 초개같이 목숨을 내던진 사관들의 기개가 감동을 준다.

사관은 대부분 벼슬에 처음 나선 젊고 패기만만한 신진 엘리트들. 그들의 주요 임무는 사초를 작성하는 일이다. 사초란 역사를 편찬하기 위해 사관이 기록하는 초안. 국왕의 공적 사적인 말과 행동을 모두 기록한다. 사관은 이 사초를 비밀리에 간직했다가 임금이 죽고 난 후 실록을 편찬할 때 역사편찬의 자료로 제출한다.

고려말 사관으로 재직했던 이행은 자신의 사초에 ‘이성계는 죄없는 사람을 살해했다’고 기록했다. 이후 조선이 건국되고 이행은 자신의 사초를 제출했다. 이행의 사초를 본 이성계가 가만 있을 리 없었다. 당연히 귀양. 이것이 조선 최초의 사초 필화사건이었다.

사관들은 국왕의 동정을 기록하는데 그치지 않고 고관들의 비리, 잘못된 사회풍조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이 책은 역사의 다양한 뒷얘기를 통해 역사에 관한 정보와 흥미를 제공한다. 성군이라 불리는 세종도 말년에 사관을 기피했던 사실, 사초를 제출하면서 내용을 바꾸었다가 귀양갔던 어느 사관….

전체적으로 부담없이 읽을만한 책이다. 한명 두명 조선의 사관을 만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준엄한 역사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음을 느끼게 된다. 오직 올바른 역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그들의 순결한 정신, 그리고 혼탁한 이 시대…. 354쪽, 9000원.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