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1999년 4월 1일 19시 49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한림대 김영명(金永明·정치학)교수는 이를 두고 “한국정치사에서 한 시대가 지나가고 다른 시대가 찾아오고 있음을 상징한 가장 폭력적인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불과 두 달도 지나지 않은 79년 12월12일. 한국정치사는 ‘다른 시대’가 찾아오는 길목에 복고반동(復古反動)의 저항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폭력을 경험한다. 신군부세력이라고 이름지어진 군인들에 의한 ‘12·12’사태였다. 중앙대 김동성(金東成·정치학)교수는 “12·12는 군내부의 심각한 권력투쟁의 단면이었을 뿐만 아니라 10·26 이후 민주화이행가능성에 쐐기를 박고 권위주의로의 복귀를 허용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12·12사태 이후 시대를 원상으로 회복하는데는 다시 7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26은 동시대인들에게 새로운 시대를 예감케 한 충격이었다.
사흘 뒤 열린 시국대책회의에 대한 당시 김치열(金致烈)법무부장관의 회고만 봐도 그렇다.
“박대통령의 서거로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었다는 생각을 모두 갖고 있었습니다. 박대통령께서는 말기에 가서 유신헌법을 고치고 다시 임기 이전에 물러나겠다는 소신을 개인적으로 피력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박대통령마저도 시한부라고 생각했던 유신체제를 그 분이 돌아가신 뒤에도 유지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섰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신체제의 붕괴는 ‘돌발적 우연’에서 출발했다.
김재규(金載圭)중앙정보부장이 궁정동의 밀실에서 박대통령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야당과 재야, 학생운동권으로 상징되는 저항세력이든, 유신세력이든 박대통령의 피살은 말 그대로 돌발사태였기 때문에 그 어느 쪽도 ‘박정희 이후’를 겨냥한 구체적인 정치구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12월7일 유신의 상징이었던 긴급조치9호가 해제되면서 가택연금조치에서 해제된 김대중(金大中)씨나 신민당의 김영삼(金泳三)총재도 마찬가지였다. 10·26은 곧바로 권력의 공백을 가져왔다.
얼마후인 12월12일, 전두환장군을 정점으로 한 군내 ‘하나회’그룹은 최규하(崔圭夏)대통령권한대행의 재가도 받지 않은 상황에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鄭昇和)장군을 연행해 하룻밤 사이에 군권(軍權)을 장악했다.
미국쪽에서 10·26직후 한국의 권력상황에 대해 “최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형식적 정부와 전두환장군을 정점으로 하는 실제적 권력으로 성립된 ‘이중권력구조(Dual Authority Structure)’상태”라고 지칭한 것은 정확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10·26은 단순한 돌발사건이 아니었다.
민주화세력이 유신 이후의 새 질서를 구축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고 그런 미성숙이 12·12를 부른 배경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유신체제 붕괴에는 민주화세력의 도전이 핵심역할을 수행했던 것은 분명하다.
유신헌법 선포 1년 뒤인 73년말부터 대학가에서는 개헌서명운동이 일어났고 76년 김대중 윤보선(尹潽善)전대통령 등 각계 지도자들이 ‘민주구국선언’을 선포하면서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급기야 78년 제10대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보다 1.1% 더 높은 득표율을 올렸다. 여기에다 79년 8월의 YH사건과 김영삼신민당총재 직무정지가처분 및 의원직 제명으로 유발된 부마(釜馬)항쟁이 터지면서 유신체제는 막다른 골목을 향해 치달았다.
유신의 몰락은 역설적으로 박정희 권위주의정권이 만든 결과였다. 권위주의 세력이 성취한 경제발전의 결과로 사회세력이 다양화되고 그같은 바탕 위에서 민주저항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0·26엔 ‘모순이 성장해 태반(胎盤)을 제공하던 구질서를 깨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는 변증법적 정치발전이 숨어 있었다. 비록 12·12라는 반동이 찾아오긴 했지만 이듬해 계속된 ‘서울의 봄’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은 10·26이 단순한 우연이 아님을 보여줬다.
〈김창혁기자〉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