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5)

  • 입력 1999년 1월 5일 19시 11분


여기서는 언제나 똑같은 계절의 변화가 어느 해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작은 사건들에 의해서 나무의 나이테처럼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이를테면 내가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던져 주던 고양이 껌둥이가 죽던 겨울, 팔십세의 양씨 노인이 안나가겠다고 밤새 울던 어느 가을날, 보일러실 화부를 하던 합죽이가 만기석방 일주일을 앞두고 밤에 코골며 자다가 호흡곤란으로 죽던 날, 등으로 해를 기억하곤 하던 것이다.

자아 이리 좀 와 보시오.

주임이 책상 위에 트렁크며 서류봉투를 얹어 놓고 나를 불렀다. 나는 열이 오른 난롯가에 앉아서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므로 얼른 일어나 그의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주임이 트렁크를 열자 안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검은 가죽구두였다. 끈이 없이 매끈하게 코를 뽑은 구두에서는 불빛에 반사된 광택이 반짝이고 있었고 그것은 발에 끼우는 물건이라기보다는 무슨 정교한 세공품처럼 보였다. 그리고 포근해 뵈는 모직 남방과 점퍼, 또한 지난 세월동안 한번 본적도 없던 가죽 벨트까지 있었다. 아직도 상표가 붙은 채인 새 속옷들과 양말도 보였다.

옷을 갈아 입어요.

나는 껍질을 벗듯이 수의를 벗기 시작했다. 먼저 중공군 옷이라고 서로 웃던 솜을 두어 누빈 투박한 상의를 벗고 허리띠 없이 손가락만한 끈으로 앞자락을 여미던 바지를 벗었다. 무릎이 튀어나온 털실 내의를 벗고 이제는 그야말로 러닝 팬티 차림이 되었는데도 나는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서늘하게 땀이 식어가고 있었다.

천천히 해요. 시간은 충분하니까.

주임이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신체검사를 받을 때처럼 일사불란하게 벗어서 채곡채곡 개어서 발 앞에 쌓아 두고 이번에는 역순으로 속옷부터 새것으로 걸치기 시작했다. 남방을 입고 바지를 입고 그 위에 허리띠를 두르고 맞춤하게 조여서 고정시키고 나서 나는 한 호흡을 쉬었다. 그리고 날카롭게 곤두선 바지 주름을 한번 내려다 보았다. 아아, 나는 관리들과 같은 줄이 선 바지를 입은 것이다. 구두를 신었더니 발이 너무 작아 보여서 바지 가랑이에 묻힐 것만 같았다. 그리고 끝으로 포근하고 품이 넉넉한 점퍼를 걸쳤다. 벗어 놓은 옷가지들은 내 발 앞에 넝마가 되어 쌓여 있었고 고무신은 죽은 사람의 마지막 유품처럼 그 위에 가지런히 얹혀 있었다.

오 선생 옷걸이가 좋소.

허허 그러구 보니 우리 소장님 같은데 그래.

주임과 계장이 한마디씩 던졌다. 나는 말없이 보따리 두 개를 트렁크 안에 넣었다. 주임이 서류 봉투에서 돈을 꺼냈다.

자아 이건 영치금이고 이건 계산서… 이쪽은 영치품인 모양인데.

나는 돈을 그냥 접어서 점퍼의 안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맞나 헤어보슈. 나중에 괜히 떼먹었다구 하지말구.

아 됐습니다.

주임은 작은 플라스틱 바구니에 영치품을 쏟아 놓았다. 드문드문 나뭇잎 무늬처럼 구멍이 뚫린 금반지 하나, 누님이 보낸 편지들, 돌아가시기 전에 찍은 어머니의 사진, 그리고 다 바래고 쭈글쭈글해진 갈색의 지갑이 있었다. 나는 지갑의 가운데를 열어 보았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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