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에세이]공지영/「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 입력 1998년 4월 24일 07시 25분


나는 지금 36세, 서양식으로 말하자면 35세이다. 슈베르트는 서른한살에 죽었고 모차르트는 37세에 죽었다. 그런데 괴테는 37세 생일을 앞둔 어느날 새벽 3시,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와 이탈리아로 떠난다. 그리고 제 인생과 문학관을 뒤집어 놓는다. 사실 그 이전 괴테는 젊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영화를 누렸었다.‘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독일과 전 유럽을 발칵 뒤집어 놓으며 등장했고, 속속 문제작들을 발표했으며 십년간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가로 영예와 부를 누리기도 했다.

흥미있는 것은 괴테가 바로 그 젊음과 영광의 정점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괴테는 아마도 36세 여름, 아니 그 이전부터 그는 자신의 꿈을 하나씩 챙겨 다짐의 가방을 꾸렸을 것이다. 내일은 떠나야지, 하면서 떠나지 못한 수많은 밤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작은 오소리가죽 가방과 평범한 여행가방 하나에 다 담아가기에는 그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또 알고 있었다. 37세,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이, 안주는 곧 정신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 책은 서가에 꽂아놓고 조금씩, 나의 삶이 고여 나른하게 정체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조금씩, 음미하며 읽어야 한다. 개개인의 감정과 내면의 중요성을 주창하던 그가 이 책에서는 철저하게 감정을 배제한 채 대상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그는 이제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나’로서가 아니라, 뿌리를 가지고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문화와 사람들을 의식하며 진정으로 성숙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책을 다 읽은 날 저녁, 나는 잠깐 멍해졌다. 나도 가방을 꾸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준비가 다 되면 떠나고, 아무도 모르게 떠나고, 그곳이 이탈리아든, 내 속의 다른 내일이든 그곳으로 떠나고, 그리고 뒤집어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모든 것들을 숨김없이 꺼내놓고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를 저울에 올려 놓아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렵고 그리고 설레는 말인가. 그의 말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준비’를 해왔는지 모른다. 그러니 모든 것이 고정화되고 가두어지기 쉬운 나이에 이런 반역을 꿈꾸게 해준 이 책을 읽은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공지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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