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분쟁 재판부 첫날]어제의「이웃」,오늘은「남남」

  • 입력 1998년 4월 16일 20시 29분


어제까지 ‘정다운’ 집주인과 세든 손님이었다. 그러나 오늘 ‘살벌한’ 법원에서 원고와 피고로 마주섰다. 전세금분쟁. 누구의 탓도 아니다. ‘IMF국난(國難)’의 서글픈 그림자일 뿐.

15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지법 1662호 전세보증금소송 조정(調停) 심문장. 임대차전담재판부인 박해식(朴海植)판사가 보증금반환 소송을 낸 세입자와 집주인간의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마련한 첫 자리다.

“사무실이 도저히 안 나가. 두달만 봐줘. 5년간 잘 지냈잖아. 너무 매정하게 굴지마.”(80대 집주인)

“할아버지. 저는 봐드릴 형편이 못돼요. 보증금 3천만원을 돌려받고 나가야 살 수 있어요.”(40대 세입자)

보다못한 박판사가 집주인에게 제의했다.

“전세금을 내리면 새로운 세입자가 나서지 않을까요.”

집주인은 어림없다는 표정이다. 주택 전세계약도 최악의 상태인데 사무실은 말할 나위도 없다는 것. “6·25때는 떨어지는 포탄만 안맞으면 살아남았는데 요즘은 그냥 앉아서 죽게 생겼어요. 이 나이까지 고생해서 건물 하나 지은 건데…. 솔직히 억울해.”

30분 가까이 계속된 실랑이속에 평소 집주인의 인정(人情)을 아는 세입자가 한 발 양보하면서 일단락됐다. 두 달 뒤 보증금을 돌려받는 것을 조건으로 이자의 절반과 소송비를 세입자가 손해보기로 한 것.

이어 등장한 50대 집주인 전모씨와 세입자 박모씨(32).

박판사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합의에 이르려는 순간, 전씨는 박씨가 자신의 집 두 채를 모두 가압류한 사실을 알고 크게 화를 냈다.

“나 못참겠어. 소송비가 10억원이 들어도 보증금 4천5백만원 못 돌려 주겠어.”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에서 박판사가 나섰다. “전후사정이 어떻든 젊은 분(세입자)이 사과하시죠.”

잠깐 고민하던 박씨가 전씨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저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주위에 있던 10여명의 집주인과 세입자가 박수를 보냈다. 이날 조정심문을 한 13건 중 합의에 이른 것은 8건. 성공률 61.5%.

〈부형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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