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동아 장편소설당선작]「추억쪽으로…」쓴 김내언씨

입력 1998-03-31 08:36수정 2009-09-25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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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백경’의 작가 허먼 멜빌의 단편 ‘서기 버틀비’. 평생을 서기일로 늙어 자신이 쓰던 책상이나 펜처럼 사무용품이 돼 버린 것 같던 무표정한 사내 버틀비.

98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 ‘추억쪽으로 나무들이 서 있을 시간이다’의 주인공 김미선은 그 버틀비와 닮았다.

늙은 버틀비에 비유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인 스물여섯의 처녀. 그러나 삶에 반응하는 그의 겉 모습은 버틀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방 소도시. 사장을 포함해 직원3명인 조그만 출판사의 여직원. 세상의 모든 것들과 자신이 지극히 무관하다고 느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자신의 존재조차도 몹시 낯설어하는 그에게 유일한 소일거리는 ‘창문 틈으로 바깥을 엿보며 하루종일을 견디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관심한 표정은 운명의 폭력성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나름의 생존방식이다. 3년전 헤어진 남자. 그의 몸에서 났던 담배냄새에 길들여져 만원버스에서 어느 낯선 남자의 등에 무심결에 코를 박고 서 있었던 처참한 기억. 이후 미선은열정에자신을 내맡겨 함부로세상과몸을 섞지도 않고 ‘무엇인가다른삶’을 꿈꾸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때의 열정과 그로 인한 패배의 기억에 신음하면서 미선의 삶 언저리를 떠도는 인물들.

“난 상처 입어도 좋아요. 지구 끝까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이 있어줄 사람을 찾아나설 거예요”라고 말하는 미선의 사무실 옆 화실남자 이영환. 싫다는 그를 좇아 광적인 사랑을 퍼붓는 애인 정수연. 영환은 미선에게 ‘함께 다른 곳으로 떠나자’고 애원하지만 미선은 거부한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사람에게 현실은 언제나 그대로죠. 그리고 나처럼 새로운 길은 없다고 그들은 말하게 되겠죠.”

극적인 사건을 배제한 채 일상의 지리멸렬한 모습만으로 긴 분량의 서사를 완성한 작가 김내언(金耐言·30). 그의 힘은 남루한 삶을 걸머지고 살아가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의 가슴 밑바닥을 투명하게 비추어낸다는 데 있다.

한국땅에 수만개는 족히 될 듯한 보잘것없는 사무실. 누구의 눈길도 끌지 못한 채 그곳에서 젊음의 한 시절을 견디는 ‘아주 작은 사람들’의 가슴에 얼마나 깊은 고독의 우물이 있는지, 삶에 무연해지기까지 각자 건너야 했던 젊음의 통과의례는 얼마나 깊고 거칠었는지 작가는 소박한 목탄화를 그리듯 묘사해낸다.

“조금만 시선을 달리해서 보면 평범해 보이는 삶에서도 아주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작품을 쓰면서 보통사람 속에 숨어있는 새로움을 그려내고자 애썼어요. 단순한 삶에도 꼭 그 그릇 만큼의 에너지는 필요한거니까요.”

김내언은 이미 9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당선한 작가. 이번 소설 당선에는 가족들의 도움이 컸다.

시인인 남편은 그에게 자신의 시 한구절을 빌려줘 제목을 짓게 했다. 남편은 시집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동네’(문학과 지성사)를 펴낸 시인 성윤석. 한창 작품을 쓸 때 뱃속에 있던 아들도 투정없이 순하게 견뎌줘 엄마를 도왔다.

시상식은 4월2일 오후3시 서울 충정로 동아일보 사옥 17층 동아클럽. 상금은 2천만원. 책은 4월2일 동아일보 출판부에서 발간된다.

〈정은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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