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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7년 12월 31일 18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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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나는 알지 못할 힘 같은 걸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땅 속에 숨어 있다가 기어나온 매미와 같은 힘이었다. 그렇다. 나 자신이 매미 같은 존재였다. 몇 주일을 살기 위해 수천일을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나는 이제 어둠을 뚫고 나가 화려한 삶을 끝마치는 그날까지 마음껏 날며 소리지를 것이다.
그는 책을 내려놓고 창가로 다가간다. 벤치는 텅 비어 있다. 햇빛이 내리쬐는 벤치 옆에 몰골이 험한 개가 앉아 있다. 개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나가던 청년이 개를 힐끗 쳐다본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져준다. 그러나 개는 꼼짝도 않는다. 개의 주변으로 아이들이 몰려든다. 아이들은 개를 만져보기도 하고 꼬리를 잡아당겨 보기도 한다. 개는 그런 아이들이 귀찮게 느껴지는지 한 차례 컹 짖는다. 아이들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선다. 개는 다시 먼 하늘을 쳐다보며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한참 동안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블라인드를 내린다. 그리고 침실로 들어가 외출복으로 갈아입는다.
밖으로 나온 그는, 맑고 싱그러운 공기에 취한 듯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파릇한 풀과 나뭇잎을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그리고는 가슴을 펴고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다. 어디서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매미의 울음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긴다. 매미는 플라타너스 가지 사이에서 울고 있다. 그는 눈이 부신 듯 나뭇잎 사이를 올려다본다. 지나가던 경비원이 아는 척을 한다. 그동안 어디… 외국 출장이라도 다녀오셨나보죠?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셨군요. 하도 안 보이시길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했죠. 경비원은 겸연쩍게 웃으며 걸음을 떼어놓는다.
그는 남자가 앉아 있던 벤치쪽으로 걸어간다. 몰골이 사나운 개가 꼬리를 흔들며 그를 올려다본다. 그는 개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벤치에 앉는다. 개는 계속 낑낑거리며 그의 주변을 맴돈다. 그는 개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둬 푸른 하늘을 올려다본다. 누군가 아파트 창문을 열고 홑이불을 털고 있다. 하얀 천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처럼 퍼덕인다. 그 아래층에서 젊은 여자가 유리창을 닦고 있다. 여자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유리창에 물을 뿌린다. 호스에서 뿜어져 나온 물은 유리창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린다. 빨래를 널고 있는 남자가 보이는 것은 9층이다. 남자는 속옷 차림으로 간이 건조대에 빨래를 널고 있다. 검은 빨래가 바람에 날린다. 남자는 한참 동안 날리는 빨래와 씨름을 하고 있다. 그는 5층으로 시선을 옮긴다. 푸른색 블라인드가 보이는 창 안은 죽은 듯이 고요하다.
그는 한참 동안 그곳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매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매미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옆에 앉아 있던 개가 컹 짖는다. 그와 동시에 매미가 푸드득 날아간다. 매미는 검은 점을 남겨놓으며 하늘 저편으로 사라진다. 개는 매미가 사라진 하늘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다시 벤치 아래 웅크리고 앉는다. 저기 말이에요. 오백 오호 여자…. 중년 부인 두 명이 가로수 밑에 서서 수다를 떨고 있다. 누구요? 아, 그 있잖아요. 오층 여자 말이에요. 남편이 논다는…. 그런데요? 그 여자가 남편을 칼로 찔렀대요. 그래요? 잘은 모르겠는데 중태라지요. 아마…. 다른 남자한테 미쳐 돌아다니더니… 쯧쯧. 그리고 말이에요. 매일 이 벤치에 나와 앉아 있는 사람…. 김부장이라는 사람 말인가요? 그래요. 글쎄, 그 사람 병이 도져서 어젯밤 갑자기 죽었대요. 무슨 병으로요? 급성 폐렴이라나, 폐암이라나. 에이그, 그 좋던 직장 잃고, 재산 날리고, 여편네까지 도망치더니…. 사람 일 알 수 없는 거예요. 언제 어떻게 될지. 그리고 저 개 말이에요. 안경을 쓴 여자가 슬그머니 개를 가리킨다. 집도 없이 나돌아다니는 갠데… 매일 그 사람하고 붙어 있더니만…. 미친 개는 아니겠죠? 아니에요. 오갈 데가 없어서 그렇지 귀엽게 생겼잖아요. 하긴…. 뚱뚱한 여자가 그를 힐끗 쳐다보며 목소리를 낮춘다. 근데, 저 사람은 누구예요? 글쎄… 인물은 훤하니 잘 생겼는데…. 우리 아파트 사람은 아닌가보죠?
그는 낑낑거리는 소리에 눈을 돌린다. 개가 꼬리를 흔들며 그를 빤히 올려다본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개에게 줄 무언가를 찾는다. 하지만 줄만한 게 없다. 그는 잠시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다가 바지 주머니에서 검은 약봉지를 꺼내든다. 그리고 개에게 던져주려다 말고 입속으로 중얼거린다.
“안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