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층이나 육층 높이에서 인간의 모습을 내려다보자. 그들은 보도 위를 당당하게 걸어다니지만, 하나같이 이상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흉측하게 불거진 엉덩이며 가슴, 그리고 연신 앞뒤로 뻗치는 팔과 다리, 모든 게 꼴불견이다. 그들의 위대한 눈과 코, 그리고 입은 어디로 갔는가. 인간들은 모두 바닥에 납작하게 눌려서, 마치 게처럼 땅 위를 기어다니고 있다.
그는 책을 덮고 소파에서 일어선다. 해는 아직도 아파트 옥상에 걸려 있다. 물탑 뒤로 몸을 숨긴 채 쏟아내는 햇빛은 투명하다 못해 예리하다. 그 빛을 타고 물탑의 그림자가 옆 건물 벽으로 날아가 박힌다. 하늘로 뾰족하게 솟아 있는 물탑은 톱날의 날카로운 음영으로 옆 건물 벽을 자르고 있다. 엷은 미색의 아파트 벽은 잘리기 직전의 마디카나무처럼 위태롭다. 그 밑으로 고압 전선이 늘어져 있고, 전선에 매달려 있는 애자가 보인다. 해는 아주 조금씩 물탑 뒤로 숨어들어간다. 그는 창가에 서서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해의 움직임과 물탑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다.
아파트 앞 도로에 검은색 승용차가 멈춰 선다. 승용차 문이 열리며 옆집 여자가 내린다. 여자는 습관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아파트 정문을 향해 걸어간다. 승용차는 여자를 내려놓고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던 여자가 돌아서서 웃는다. 여자의 웃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승용차 유리창이 반짝 빛난다. 여자가 아파트 안으로 사라진다. 그와 동시에 승용차도 느릿느릿 굴러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정적에 휩싸인다.
그는 블라인드를 내리고 돌아선다. 그의 발 밑에 반라의 모델들이 누워 있다. ―나를 가꾸는 여자가 아름답다― 여자는 커다란 젖무덤을 양손으로 움켜쥔 채 말한다. ―발도 스킨 케어가 필요해요― 금발에 갈색 눈을 가진 여자가 발가락 사이에서 웃고 있다. 그는 여자의 얼굴에서 발을 뗀다. 그러자 발 밑에 숨어 있던 글자들이 튀어나온다. ―피부 미용의 기본 스킨 케어― 거실 바닥은 널려 있는 광고지로 어지럽다. 그는 광고지를 밟으며 거실을 가로질러 간다. 그리고 욕실 안으로 들어간다.
그는 얼굴에 물을 축인 다음 쓱쓱 비누칠을 한다. 꺼칠꺼칠한 수염 때문에 비누 거품이 잘 일지 않는다. 그는 수납장 안으로 손을 넣어 면도기를 찾는다. 손끝에 만져지는 건 도막난 칫솔과 쓰고 버린 립스틱 뚜껑이다. 그는 계속 수납장 안을 이리저리 더듬다가 아무거나 집어든다. 그의 손에 잡힌 면도기는 손잡이가 굵고 거친 것으로 보아 질레트가 분명하다. 그는 잠시 이맛살을 찌푸린다. 면도를 하기에는 질레트보다 쉬크가 한결 부드럽다. 그는 질레트를 내려놓고 쉬크를 집어든다. 그는 실눈을 뜨고 거울을 들여다본다. 비누 거품 위로 시커먼 수염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일주일이 넘도록 밀지 않은 수염은 발이 굵고 거칠다. 그는 면도기를 턱밑에 대고 앞으로 당긴다. 그러자 면도기가 사선으로 쭉 미끄러진다. 잠시 후 턱밑에서 피가 배어난다. 그는 허겁지겁 물을 축여 피를 닦는다. 하지만 피는 계속해서 배어난다. 그는 수건으로 상처 부위를 누른 채 욕실 밖으로 나온다.
나는 갈 곳이 없다. 어디를 가든 기지와 재치에 번뜩이는 인간들만 득실거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아이큐가 1백50 이상이거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다. 나는 이제 살아갈 의욕조차 상실했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도 어려웠고, 끝까지 버텨봐야 결국 이용만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책을 내려놓고 창가로 다가간다. 이차로 도로 가장자리에 벤치가 있고, 거기에 남자가 앉아 있다. 남자의 모습은 마치 벤치 위에놓여 있는정물처럼 보인다. 벤치 뒤로남자의 그림자가 길게 누워 있다. 하지만 남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남자가 가만히 있는 것처럼 그도 창가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남자는 언제나 반소매 셔츠와 회색 바지를 입고 있다. 단 하루도 옷차림에 변화를 준 적은 없다. 행동도 언제나 똑같다. 해가 뜨기 무섭게 어디선가 나타나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닌다. 마치 무언가를 찾아야 하는 사람처럼. 그 일이 끝나면 시장 골목으로 들어가 아침을 먹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와 다시 벤치로 돌아온다. 그때부터 벤치 위에서 하루를 보낸다. 남자는 벤치에 앉아 있기도 하고 누워 있기도 한다. 가끔씩 심하게 기침을 하며 가래침을 뱉지만, 그 외에는 특별한 움직임이 없다. 남자는 아주 드물게 진씨의 포장마차에서 따뜻한 국물을 얻어먹기도 한다. 그러나 남자의 움직임이나 태도로 보아 먹는 것 자체도 망각해버린 사람 같다.
벤치에 앉아 있는 남자의 등뒤로 대로처럼 공터가 보인다. 공터의 나무 위로 고압 전선이 지나간다. 전선은 공터 끝의 이층 건물과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선이 닿아 있는 이층은 H아파트 상가 건물이다. 고층 아파트 사이에 끼여 있는 상가는 터널을 통과하는 열차처럼 보인다. 남자는 전속력으로 달리는 열차 앞에 무심히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는 창가로 바짝 다가선다.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그는 남자에게 던지고 있던 시선을 거둬 전화기를 바라본다. 전화기는 ‘자동 응답기 켜짐’에 불이 들어와 있다. 벨은 다섯 번을 울리고 응답 메시지를 전한다. 지금은 외출 중입니다. 메모 남겨주세요. 나 퀸 광고 기획 박이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사람 놀라게 해도 그렇지…. 궁금해서 전화 걸었어. 들어오면 전화해 줘. 그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돌아선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거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팜플렛을 주워든다. ―산 마리노, 플레이보이, 보스렌자 신사 정장― 남자 모델이 웃고 있다. ―140데니아의 초고탄력 스타킹― 반라의 여자는 요염한 포즈를 취하고 누워 있다. 그는 다른 종이를 집어든다. ―금세기 최고의 인공 가슴 하이테크 실리콘 바스트―
옆집 여자가 음악을 듣고 있다. 템포가 느리고 무거운 것으로 보아 클래식이 분명하다. 그녀가 클래식을 듣는 건 기분이 나쁘다는 징조다. 주로 재즈풍의 음악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클래식은 폭풍의 서곡이나 다름없다. 그, 새, 끼, 누, 구, 야? 옆집 남자의 목소리가 토막토막 끊기며 들려온다. 빨, 리, 못, 대? 당, 신, 이, 나, 조, 심, 하, 고, 다, 녀!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도 뒤따라 들려온다. 그는 벽쪽으로 귀를 세우고 있다가 천천히 돌아선다. 그리고 서재 안으로 들어간다. 서재 바닥에는 먼지가 하얗게 쌓여 있고, 그 위에 발자국이 찍혀 있다. 먼지 위에 찍힌 발자국은 서재 입구에서 시작해 모두 컴퓨터 쪽을 향해 있다. 그는 먼지 위에 나 있는 발자국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어간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먼지들이 풀썩 솟아올랐다가 내려앉는다. 그는 컴퓨터 앞으로 다가가 파워 버튼을 누른다. 컴퓨터는 이내 날카로운 전자음을 내며 작동을 시작한다.
그는 MAZE―A 프로그램 속으로 들어간다. MAZE―A 속의 방들은 온통 붉은 벽돌담과 푸른 철문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 푸른 문을 열고 나가면 또 푸른 문이 나오고, 붉은 벽돌담을 통과하면 또 붉은 벽돌담이 앞을 가로막는다. 그는 푸른 문과 벽돌담 사이에 숨어 있는 비밀 통로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아까운 시간만 흐를 뿐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출발한 곳에서 멀어질수록 주위는 점점 더 어두워지고, 힘은 떨어져간다. 어디선가 에너지를 보충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돌아가지도 못한다. 그는 땀을 흘리며 높은 담사이를 헤맨다. 하지만 아무리 헤치고 나가도 끝이 없다. 이제 빛은 완전히 사라졌다. 남아 있는 건 괴물의 음산한 숨소리뿐이다. 그는 마우스를 밀어놓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서재 밖으로 나간다.
남자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거리를 아무런 표정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러한 남자의 모습은 마치 아파트 담과 함께 굳어버린 콘크리트 조형물처럼 보인다. 남자 앞에 진씨의 봉고 트럭이 멈춰 선다. 진씨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차에서 내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적재함 천막을 걷어올린다. 그러자 적재함 속에 숨겨져 있던 포장마차가 모습을 드러낸다. 진씨는 주위를 둘러본 후 플라스틱 의자를 보도 위에 늘어놓는다. 진씨가 벤치의 남자를 향해 씩 웃는다. 남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진씨는 적재함 밖으로 음식물과 술병을 가지런히 진열한다. 정, 말, 대, 지, 않, 을, 거, 야? 잠잠하던 옆집에서 다시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