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너버머/언론에 남긴 과제]

  • 입력 1997년 11월 22일 08시 09분


「3개월내 전문을 게재하지 않으면 폭발물 테러를 재개하겠다」. 95년 6월 미국의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지에 두툼한 논문 한권이 협박장과 함께 날아들면서 언론의 고민은 시작됐다. 「뉴스 가치」를 기준으로 보도해야 한다는 「언론의 직업윤리」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공공의 이익을 존립 근거로 하는 언론기관으로서 「공공의 안전」을 우선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시한을 코앞에 두고 두 신문사는 결단했다. 현대 산업사회와 기술문명을 비판하는 3만5천자의 「유너버머선언문」을 신문 8쪽에 인쇄해 발행한 것이다. 언론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두 신문의 발행인은 『공공안전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으로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믿는다. 설령 범행이 계속된다 해도 우리가 잃을 것은 없다고 본다』며 게재 배경을 설명했다. 서울대 박승관교수(언론정보학과)는 『중대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두 신문사가 내린 결정은 충분히 이해된다』면서 『유너버머의 행동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지만 선언문 자체는 문명비판론적인 철학적 깊이가 있어 독자들이 참고할 만하다는 판단도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사전에 검찰총장과 FBI국장으로부터 게재하는 편이 낫겠다는 의견을 전달받긴 했으나 두 신문사는 게재후 다른 언론사로부터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일례로 디트로이트 뉴스지의 사설은 『이제 범죄자들이 신문 1면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기 위해 일부러 살상을 저지를지 모른다』면서 『터무니 없는 범죄자의 글을 싣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지지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연쇄 범죄―성명서 전달―재개 협박」이란 형식의 모방 범죄를 부추길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테러리스트는 언론을 좋아한다. 범행동기를 알리는 선전 도구로 써먹기 위해서다. 부산대 채백교수(신문방송학과)는 『신문지면의 공공적 성격을 고려할 때 유너버머 사건의 경우처럼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채교수는 『언론인도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의무가 있기 때문에 당시 게재한 사안에 대해 선악을 따지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유너버머 사건의 경우 다행히 결과가 좋았다. 신문을 통해 선언문을 접한 독자가 『내 형이 하던 소리와 비슷하다』고 제보해와 용의자를 검거한 것이다. 그러나 게재후 범행이 재개되었거나 유사 범죄가 생겼다면 두 언론사는 범죄자에 농락당해 반사회적인 범죄를 부추겼다는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헌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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