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경기불황과 대선을 앞둔 정치적 혼란이 한국사회를 불안(不安) 불신(不信) 불확실(不確實)의 「3불(三不)시대」로 몰아넣고 있다.
조기퇴직과 명예퇴직으로 지난해 말부터 직장인들 사이에서 일기 시작한 불안감이 주가폭락과 환율급등의 여파로 사회 전체에 확산되면서 심리적 공황(恐慌)의 조짐마저 나타나고 있다.
특히 고용에 대한 불안감은 최근 거의 정점에 달해 자격증시험 준비학원과 기능전문학원은 안정된 새 직업을 찾으려는 직장인들로 넘쳐나고 있다.
올해 대학생과 주부 사이에 공인중개사 등 각종 자격증 취득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로 공인중개사 시험에 12만명, 물류관리사 시험에 8만명이 응시했다.
사회전체의 불안감이 고조되자 신경정신과병원을 찾는 사람들도 크게 늘고 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신경정신과의원의 박진생(朴鎭生)원장은 『극심한 불안증세를 호소하는 환자가 지난해에 비해 두배 가까이 늘어났다』며 『사회적 불안이 지나쳐 자기자신을 믿지못할 지경에 이른 사람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불안감과 함께 한국사회를 휘감고 있는 또 하나의 증후군은 정부정책과 정치권에 대해 더욱 팽배해진 불신감.
정부정책에 대한 불신은 증권가에서 특히 심각하다. LG증권 김모씨(28)는 『당장 한두달 뒤의 정부정책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누가 안심하고 증권에 투자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정치에 대한 불신은 거의 극에 달해 대선을 한달여나 앞둔 상태에서 젊은층일수록 기권의사를 밝히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대학생 유모씨(21)는 『현재 대선후보를 비롯해 정치인들이 하는 말은 하나도 믿을 게 없다』며 『후보들이 내놓는 공약도 이행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같은 불신감은 가까운 친지라도 대출보증을 서 주는 것을 꺼리는 등 개인간의 불신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회사원 조모씨(33)는 『얼마전 급히 돈이 필요해 가까운 친구와 친척에게 보증을 부탁했으나 모두 거절해 어쩔 수 없이 비싼 사채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최근 경기 고양시의 한 아파트로 이사를 한 주부 정모씨(29)는 전세금을 2시간가량 늦게 건네게 되자 집주인이 이삿짐을 집안으로 들이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이삿짐이 몽땅 비에 젖는 낭패를 맛보았다.
불안과 불신에 못지않게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것은 좀처럼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경제와 정치 전반에 걸친 불확실성.
은행의 경우 기업 대출기간이 종전에는 1년이상이었으나 3개월마다 신용을 조사해 대출연장 여부를 결정하고 있으며 신용 대출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이같은 불확실성은 국민에게 불안과 불신을 극복할 수 있는 의지마저 빼앗아 해외이민 희망자가 다시 늘어나고 있다.
캐나다 이민수속을 밟고 있는 김모씨(41)는 『한치앞도 내다볼 수 없는 국내상황에 염증이 나 차라리 해외로 나가 마음 편히 사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이민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모 국영기업체 과장 김모씨(41)는 『지난해말 회사가 대규모 명예퇴직을 단행하는 것을 보면서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외국으로 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털어놨다.
사회전반에 걸친 「3불 현상」에 대해 서울대 사회학과 한상진(韓相震)교수는 『고용불안 정치불신 경제의 불확실성 등이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증폭시키면서 권위주의로의 복귀를 부추기고 있다』면서 『「박정희신드롬」도 이같은 맥락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서울대 심리학과 차재호(車載浩)교수는 『증시폭락 등으로 삶의 터전을 잃는 사람과 명퇴자가 늘어나는 등 이른바 「좌절층」의 증가는 사회적 긴장을 높이면서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불러오기 쉽다』고 지적했다.
〈이현두·윤종구·박정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