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의 생애에서 더러는, 저 혼자 힘으로는 결코 건널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거대한 강물과 맞닥뜨리기도 하는 법이다. 그해 5월 그 도시에서 바로 그 강과 마주쳤을 때 나는 스물여섯살의 대학 4년생이었다…」.
오랜 침묵을 깨고 새 소설 「봄날」(문학과 지성사)을 내놓는 작가 임철우(42). 책에 실은 작가후기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그해 5월」과 「그 도시」는 어디인가. 80년 그리고 광주.
불과 17년전 일이지만 사람들의 의식속에서는 낡은 역사일지의 한대목으로 잊혀져가는 「그 일」을 기어이 그는 이 흐느적거리는 세기말 한가운데에 끄집어냈다. 2백자원고지 7천장, 무려 5권의 분량이다.
「봄날」을 완간하기까지 그는 꼬박 10년을 바쳤다. 마지막 4년은 계간지에 중편소설 한편 발표하지 않은 채 이 일에만 매달렸다. 번잡한 일상을 떠나 소설에 몰두하기 위해 가족을 이끌고 제주도 「유배생활」을 자청하기도 했다. 80년대의 「기대주」였던 그가 몇년씩이나 침묵하자 문단에서는 「이제 임철우는 소설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닌가」라는 수근거림마저 돌았다. 무엇때문에 그는 30대의 왕성한 작가적 상상력에 재갈을 물리면서까지 「봄날」에 매달려야 했을까.
『나는 내가 겪었던 광주에 대해 동시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작가가 됐다. 그러지 않고는 겁에 질려 광주를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치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떨기만 했던 그때의 나를 죽을 때까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봄날」완간의 의미는 광주에서 영혼에 피멍이 든 한작가의 한풀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봄날」은 90년대에 선보인 일련의 「5.18문학」들과 다른 지평을 열었다. 정찬의 「완전한 영혼」, 이순원의 「얼굴」, 최윤의 「저기 소리없이 한점 꽃잎이 지고」 「회색 눈사람」이 「살아남은 그들 또한 이렇게 광주를 앓고 살아야 했다」를 다뤘다면 「봄날」은 「그때 그 시간의 사람들은 이러했다」며 5.18의 현장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동료작가들과 평론가들은 『소설로서의 미학적 거리를 유지하며 80년 광주현장을 형상화한다는 것은 어떤 작가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현장보다는 그 후 사람들을 화자로 내세워 광주를 서술하게 해왔던 것이다. 「봄날」은 그런 한계를 돌파한 「5.18문학」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의의를 평가한다.
「1980년 5월16일 새벽, 산수동 오거리」.
80년 광주의 그날처럼 대하소설 「봄날」은 이렇게 시작된다.
〈정은령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