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 연구에 매달려온 40여년. 남들이 「세계최초」라며 쑥스러울만큼 치켜세우는 유행성 출혈열 병원체 발견과 예방백신 개발 뒤에는 두 귀인(貴人)과의 만남이 있다.
55년 서울대의대 조교로 있던 나는 미국 미네소타 의과대 미생물학교실에 입학했다. 뭐든 열심히 배우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지도교수인 당시 55세의 시바톤교수는 이렇게 물었다.
『한국과 일본에 뇌염환자가 매년 수만명 발생한다는 걸 알고 있나요』
바이러스 연구에 뜻을 두라는 뼈있는 한마디였다. 연수기간 2년이 지나고 석사학위를 받은 내가 귀국하려하자 그는 만류했다.
『자네 공부는 아직 안 끝났네. 추가 연수기회를 얻는 것은 나한테 맡기게』
그는 서울대에 직접 연락해 박사과정을 밟을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덕택에 나는 「일본뇌염 바이러스의 원숭이에서의 면역기전」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59년 모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몇해전 세상을 떠난 시바톤교수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바이러스 전문가 이호왕」은 없었을 것이다.
또 한 사람은 69년에 알게된 미국 육군 연구개발부 극동지부(일본 도쿄에 있었음)사령관 월튼대령이었다. 당시는 뇌염연구가 백신이 나오면서 일단락되고 새롭게 「한국형 출혈열」로 불리던 괴질 연구에 매달리고 있었다. 문제는 연구비였다.
국내는 물론 미국국립보건원(NIH)도 지원을 거절했다. 노벨의학상 수상자 등이 10년이상 실패를 거듭해왔기에 거의 포기한 단계였다. 그러나 기생충학자였던 월튼대령은 내 연구계획서를 높이 평가했다. 지원약속을 받고 얼마나 반가웠던지. 나는 지금도 그의 사인이 들어있는 문서를 소중히 간직해온다. 70년부터 3년간 4만2천달러의 연구비를 받았고 현장조사용 지프와 최신 기자재도 주한미군을 통해 보내주었다. 뿐만 아니라 후임자 마셜대령에게도 지원을 부탁하는 등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월튼대령은 그후 유행성 출혈열 병원체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자기일 처럼 기뻐하며 서울로 찾아오기도 했다.
내 연구생활의 은인들을 떠올리면서 후배 연구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귀인(貴人)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아니 나타나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호왕(아산생명과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