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학기가 시작된 지난 3월초. 수업이 끝난 서울 강남구 K고등학교 교실 구석에 10여명의 까까머리들이 모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2주밖에 남지 않았어』
『내가 3반과 6반 반장을 끌어들일테니 너는 12반과 15반을 맡아』
『태석(가명·18)이네 진영에서는 반장쪽보다 입심이 센 녀석들을 포섭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쪽 애들은 활동자금도 넉넉한가봐. 어제 저녁 2학년 애들을 데리고 피자집에 들어가던데』
회장후보 이동희군(가명·18.3년)은 참모들이 던지는 말에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전세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태석이가 학생회장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저쪽에서는 남녀 공학을 만들고 두발까지 자율화하겠다는 공약을 준비중이라는 얘기가 흘러 나오고 있어』
『별로 실현가능성이 없는 공약이지만 1,2학년 애들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은데』
『우리도 뭔가 획기적인 선거공약을 준비해야 돼. 지난해 학생회장에 당선된 형도 선거공약 지킨 게 하나도 없잖아. 애들은 별로 신경도 안쓰는 눈치였어』
『태석이의 「복잡한 여자관계」를 들춰내면 어떨까. 그녀석 여자친구가 또 바뀐 모양이야』
『그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동희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좀더 현실적인 아이디어를 내보는 게 어때. 작년 회장이 선거공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욕을 먹었잖아. 매점개선, 낙서판 구비 같은 현실적인 공약으로 승부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낙선하더라도 그쪽이 마음편하지 않겠니』
참모들은 동희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동희의 이런 점을 견디지 못해 이틀전 핵심참모중 하나인 건훈이가 떠나버렸다.
『차라리 반장을 뽑을 때처럼 선생님이 지명하는 게 더 낫겠다. 공부에 방해된다고 반장은 서로 안하겠다더니 왜 학생회장선거 때는 열을 올리는지 모르겠어』
한 친구의 푸념이 들려왔다.
아버지가 사업가인 태석이는 공부는 동희보다 못하지만 잘 생기고 운동도 잘해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
동희는 전교석차 10위권을 유지하는 우등생으로 반장경험도 있어 학생회장으로 손색이 없었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없다. 지난 2년동안 반장을 해오면서 선생님이 시키는 일은 충실하게 했지만 친구들이 바라는 일을 해결해주기 위해 선생님을 설득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투표일 1주일 전. 동희네 진영은 후보자 연설문을 만들기 시작했다.
「여러분의 눈과 귀가 되어 발이 닳도록 뛰겠습니다…」
그 사이 태석이와 참모들은 「임기내에 남녀공학 실시」 「임기내 두발 자유화 실시」 「아스팔트 농구코트 한 학년에 3곳씩 9곳 설치」 「임기내 학생식당 유치」 등 획기적인 공약이 적힌 피켓을 들고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 심지어는 수업시간에도 각반을 돌며 홍보활동을 펼쳤다. 연설문도 멋지게 만들었다.
「여러분, 순간의 선택이 1년을 좌우합니다.…」
드디어 선거일. 입후보자 연설이 시작됐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고 태석이는 압도적인 표차로 회장에 당선됐다.
그러나 아무도 태석이가 한 그 공약이 지켜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태석이네가 졸업하고 나가면 그뿐.
이런 일들은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으레 있었던 일이었다. 어른들이 늘 그렇게 하듯이.
〈박정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