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지는 동안〈4〉
그녀가 앉아 있는 나무 그늘 옆에는 두 여학생이 아까부터 꽤 긴 시간동안 어떤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또 그 옆에는 매우 예쁘게 생긴 한 여학생이 그녀와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초조한 기색으로 자주 시계를 들여다보며 언뜻언뜻 마땅찮은 얼굴을 짓곤 했다. 그가 다가가 걸음을 멈춘다면 바로 그 여학생 앞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언뜻 바라보았을 때 그 여학생은 잠시 전 가끔 짜증을 섞어 짓곤 하던 표정과는 다르게 다소곳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외에도 멀찍이 몇 사람이 한가한 자세로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가 다가와 걸음을 멈춘 건 바로 그녀 앞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녀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옆 벤치에 앉아 있는 매우 예쁜 얼굴의 여학생 쪽을 바라보았다. 그 여학생도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짧은 순간 자신의 몸보다 더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빗나간 행운과 빗나간 기대에 대한 어떤 아쉬움 같은 것이 그 여학생의 눈빛에서 묻어났다.
『저하고 잠시 이야기를 좀 할 수 있습니까?』
다시 남자가 물었을 때 그녀는 무릎 위에 놓았던 가방을 들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데요?』
『지나가다 갑자기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전부터 댁을 보았지만 얘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갑자기 이렇게 다가와 그런 말을 하면 상대방이 당황스러워 할 거라는 생각은 안해 보셨나요?』
『무슨 얘긴지요?』
『제가 지금 당황스럽다는 얘기예요. 무얼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그런 얘기를 이런 장소에서 이렇게 듣는다는 게. 더구나 전 지금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고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친구 말입니까?』
『예. 아시는군요』
『전에도 몇 번 이곳에 앉아 계시는 걸 보았습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것도 보았고요』
『그런데도 지나가다 다가와 제게 이런 얘기를 하는 건 둘 중의 하나일 것 같은데요』
<글:이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