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언론탄압… 동아일보 ‘백지광고’사건

동아일보 입력 2013-07-16 03:00수정 2013-07-1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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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69>광고 탄압
1974년 광고 탄압에 맞서 신문 하단에 백지 광고를 실은 동아일보. 동아일보DB
박정희 대통령은 1974년 9월 18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비롯해 재무 법무 문교 문공 교통 체신 건설 통일원 9개 부처 장관을 경질한다. 19개 부처 중 절반에 해당하는 대폭적인 개각이었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안 된 10월 8일 청와대에서 신문 방송 등 언론기관 대표들로부터 방위성금을 전달받는 자리에서 “현재 국내외 여건으로 볼 때 현재의 유신체제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도전도 용납할 수 없다. 현 유신체제의 기본은 지난번 국민투표로 확정된 현재의 헌법이다. 이 헌법의 절차와 헌법이 규정하는 것 외에 어떠한 방법이나 형태로든지 유신체제에 도전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현 사태를 난국이며 비상시국”이라고 규정한 박 대통령은 “국가의 여건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언론자유를 보장하겠지만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서는 언론계가 자율적으로 보도나 논평을 자제해줘야겠다”고도 했다. 특히 기자들의 취재 태도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요즘 갓 대학을 졸업하고 새로 들어온 기자들 중에는 난국의 본질과 유신체제의 불가피성을 이해하려 들지 않고 취재를 한다면서 각 대학에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마치 선동하려는 듯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그런 일이 없도록 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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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터져 나온 반유신 물결의 파고는 갈수록 높아졌다. 대통령의 발언은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이틀 뒤인 1974년 10월 10일을 전후해 전국 거의 모든 대학이 휴교에 들어갔다. 문교부는 각 대학에 데모 관련자를 제적 또는 무기정학으로 엄벌하도록 지시했다. 투쟁은 언론계까지 확대됐다.

유신체제로 접어들면서 정부의 언론탄압방식은 상당히 변했다. 이전이 비교적 거친 방식이었다면 이후부터는 정교하고 세련돼졌다. 수시로 날아온 ‘협조’ 형식의 통제가 대표적인 예였다. 문공부 장관으로부터 각 신문사 편집국장과 보도국장에게 날아오는 주문도 ①학원 내 움직임은 일절 보도를 삼가고 ②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을 때는 1단 정도로 작게 취급하며 ③연탄 문제 등 사회불안을 조성할 우려가 있는 기사는 작게 취급해 달라는 식으로 구체적이었다.

기관원이 상주해 지시가 제대로 지켜지는지 감시한 것은 물론이다.

1년 전 첫 반유신 시위였던 73년 10·2시위 직후 철야농성 기자총회 등의 형태로 언론자유 수호결의를 한 기자들은 74년 10월 24일 오전 동아일보 편집국, 출판국, 동아방송 기자 180명이 편집국에서 ‘자유언론실천선언’ 집회를 열고 선언문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언론자유수호선언을 한다. 이틀 사이에 서울과 지방을 망라한 31개 신문방송 통신사가 선언문을 채택했다.

①신문·잡지·방송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배제한다 ②기관원의 출입을 거부한다 ③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거부한다 ④불법 연행을 자행하는 경우 기자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는다 등 4개항이 담겼다.

정부도 가만있지 않았다. 12월 16일부터 동아일보를 향한 초유의 광고 탄압을 시작한 것이다.

이날 오전 동아일보 광고국에 그동안 주거래 광고 계약을 맺고 있던 모 회사의 광고담당 간부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저희 사장님께서 어디서 들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고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대한 광고를 신중히 알아서 배정하라고 하신다”는 내용이었다.

오후에는 또 다른 회사 간부가 회사로 찾아와 “이유를 묻지 말아 달라”며 광고 동판을 회수해갔다. 그로부터 4일 뒤인 12월 20일부터 본격적인 무더기 광고해약 사태가 발생했다. 절정은 1년 중 광고가 가장 많이 몰리는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 24일이었다.

동아일보 12월 26일자에는 처음으로 백지 광고가 나갔다. 한 달여 만인 75년 1월 23일까지 대광고주 20여 개사를 포함해 평상시 광고의 98%가 떨어져 나갔다. 동아방송도 마찬가지였다. 75년 1월 10일 현재 75%가 줄어들었다.

정부기관, 국영기업체, 정부투자기관도 74년 12월 25일부터 75년 1월 22일까지 동아일보에 광고를 준 곳은 단 1곳이었다. 백지 광고가 실리자 국내외 각계각층이 들고 일어났다.

야당 신민당은 12월 26일 긴급당직자 회의를 열고 ‘광고 탄압은 새로운 수법의 언론 탄압’이라 규정했다. 해외에도 알려져 이날 미국 인권단체 ‘프리덤 하우스’는 ‘동아일보 사태는 저명한 독립지인 이 신문을 괴롭히기 위해 배후에 정부의 입김이 서린 행위로밖에 볼 수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일본 아사히신문도 12월 27일자 조간에 동아일보 사태를 3면 사진과 함께 4단 기사로 다루고 다시 7면 톱으로 해설기사를 실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도 성명을 발표했다.

독자들의 격려 광고도 쏟아졌다. 동아일보 12월 26일자 1면 중간 머리기사로 ‘무더기 광고해약 사태’ 보도와 함께 2개면에 걸쳐 백지 광고가 나가자 편집국에는 격려 전화가 쇄도했고, 성금을 내려는 독자들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1975년이 밝자 국민들의 정치적 항의는 아예 ‘동아일보’ 광고란을 통해 폭주했다. 단체나 공동명의는 물론 개인 광고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분노와 성원이 광고란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75년 1월에 실린 격려 광고 중에서 인상적인 몇몇 격려 문안을 날짜순으로 간추려 소개한다(‘동아자유언론실천백서’).     
    

○ 동아일보 보는 재미로 세상 산다.(서점주인·11일)
○ 배운 대로 실행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이렇게 광고하나이다.(서울 법대 23회 동기 15인 일동·11일)
○ 빛은 어두울수록 더욱 빛난다. 금반지 반 돈을 놓고 가면서….(동아일보를 아끼는 한 소녀·13일)
○ 이겨라! 동아.(청담동 복덕방 장건장·14일)
○ 시장 길서 만난 우리들 빈 바구니로 돌아서며 조그마한 뜻 ‘거목 동아(巨木 東亞)’에 보냅니다.(주부 일동·16일)
○ 동아(東亞)! 너마저 무릎 꿇는다면 진짜로 이민(移民) 갈 거야.(이대 S생·18일)
○ 동아(東亞)는 멋쟁이! 자기는 깍쟁이!(숭덕중 졸업생 49명·18일)
○ 약혼했습니다. 우리의 2세가 태어날 때 아들이면 ‘동아’로, 딸이면 ‘성아’(여성동아)로 이름을 짓기로 했습니다.(이묵李默·오희吳姬·20일)
○ 술 한 잔 덜 먹고 여기에 내 마음 담는다.(드라이브맨 안(安)·24일)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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