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왕국2’ 엘사·안나가 진짜 여성 히어로인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5일 14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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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겨울왕국 2’ 속 엘사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2’ 속 엘사
과거 영화나 TV 드라마 속 여성영웅엔 남성적 시각이 반영된 설정이 많았다. 코르셋 차림을 한 원더우먼의 황금팔찌는 귀금속에 매혹되는 여성을 연상시키고, 그녀가 휘둘러대는 채찍(‘진실의 올가미’로 불린다)은 ‘저런 섹시한 여자에게 꽁꽁 묶인 채 철저히 유린당하며 마구 마구 진실을 털어놓아 보았으면…’ 하는 나 같은 변태들의 판타지를 들쑤셨다. 심지어 어린 시절 탐닉했던 일본만화 ‘마징가Z’에 등장하는 여성로봇 ‘비너스’는 양쪽 가슴을 미사일 삼아 천연덕스럽게 ‘슉슉’ 쏴댔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성(性) 상품화가 아닐 수 없다.

미국 드라마 ‘원더우먼’
미국 드라마 ‘원더우먼’

애니메이션 ‘로보트 태권V’의 영희
애니메이션 ‘로보트 태권V’의 영희


우리의 자랑스러운 애니메이션 ‘로보트 태권V’(1976년)는 또 어떤가. ‘훈이’와 함께 태권V를 조종하는 ‘영희’는 스스로 존재하는 영웅이라기보단 시도 때도 없이 기절함으로써, 세상을 구해야 할 훈이의 신경을 쓰이게 만드는 애물단지로 그려진다. 영희의 역할은 “홍홍. 성공이야” 하면서 훈이의 영웅적 행동에 추임새를 넣어주는 ‘내조자’에 불과하다. 게다가 훈이와 영희를 길러낸 잘난 ‘박사’ 아빠들만 등장할 뿐, 놀랍게도 이 뛰어난 소년 소녀를 낳은 어머니들의 존재는 단 한 번도 영화에서 언급되질 않는다. 훈이의 아버지인 김 박사와 영희의 아버지인 윤 박사는 모두 ‘돌싱’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 구국의 결단으로 똘똘 뭉치는 동호회원이란 말인가.

영화 ‘캡틴 마블’ 속 캡틴 마블
영화 ‘캡틴 마블’ 속 캡틴 마블
올해 ‘캡틴 마블’과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등장한 여성슈퍼히어로 ‘캡틴 마블’은 다소 변화된 시각을 보여준다. 이름부터 여성성이 ‘제로’인데다, 노출이 ‘1’도 없는 옷차림에다, 쇼트 컷 헤어에다, 심지어는 불 주먹이라는 완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굳이 여성이어야 하나’란 질문이 남는다. 남성성으로 무장한 여성영웅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탓이다.

최근 개봉한 ‘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는 여성영웅을 향한 진일보한 관점을 담고 있다. 미래에서 현재로 시간여행을 온 살인기계 터미네이터는 ‘대니’라는 멕시코 여성(백인이 아닌 히스패닉인 점도 놀라운 진화다)을 죽이려 달려든다. 1984년 ‘터미네이터’ 원작의 설정과 똑같이 그녀는 다가올 미래에 기계들에 맞서 인류를 이끌어가는 남성리더를 잉태하는 ‘인류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라고 관객들은 지레짐작하지만 막판엔 기막힌 반전이 등장한다. 알고 보니, 대니는 미래의 리더를 아들로 임신하는 ‘희망의 자궁’이라는 매개체가 아니라, 그녀 스스로가 미래의 리더가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잘 싸우고 용감하고 똘똘한 대니는 결국 여성성이 거세된 중성적 존재에 가깝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요즘 난리가 난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2’야말로, 21세기적 여성영웅을 제대로 담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이들 관객 입장에선 1편에 비해 귀에 팍팍 꽂히는 ‘렛 잇 고’ 같은 주제가가 없고, 뮤직비디오처럼 작위적인 노래장면이 많으며, 유머와 액션이 밋밋하다는 불만을 가질 수 있겠지만, 와우, 영화를 뜯어보면 여성리더십의 놀라운 비밀이 서브텍스트로 숨겨져 있는 것이다.

자, 지금부터 이 영화 속 주인공 자매인 ‘엘사’와 ‘안나’가 기존 남성영웅들의 대용물이 아니라, 여성성이 갖는 탁월한 권능을 펀더멘털로 삼는 진짜 여성히어로인 이유를 낱낱이 까발려 알려드린다, 라고 말하기 전에 두려움이 앞선다. 보나마나 몰지각한 일부 남성들로부터 “너 페미(페미니스트)냐?” “이런 × 같은 글로 균형적인 인간인 것처럼 어필해서 제21대 국회의원 되려고 하냐?” “생긴 것도 잘생기고 글도 잘 쓰는 놈이 여자들한테 인기까지 끌어서 세상을 다 가지려는 음모이냐?” 같은 악성 댓글을 받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이 칼럼을 통해 영화 ‘미성년’과 ‘걸캅스’를 다루면서 ‘지질한’ 남자들의 생리를 비판한 뒤 어마어마한 ‘악플’에 시달린 트라우마가 스멀스멀 떠오른다. 하지만 나 스스로 생각해도 깜짝 놀랄 천재적인 분석이니 터진 입으로 발설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자, 귀담아 들어보시라.

일견 ‘겨울왕국 2’는 영웅서사의 전형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태생의 비밀을 좇아 목숨을 건 모험의 여정을 떠나는 과정에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명실상부한 영웅으로 재탄생하는 성장담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결정적으로….

※ 다음 내용이 돌아버릴 만큼 궁금하시죠? ‘무비홀릭’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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