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바다의 제주 할머니 해녀들[김창일의 갯마을 탐구]〈34〉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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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해운대, 부산항, 부산공동어시장, 자갈치시장 등 부산은 바다와 관련된 최대, 최초란 수식어가 자주 붙는다. 올해 내내 부산의 해양문화를 조사하기 위해 영도다리를 오갔다. 그러고 보니 영도대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연륙교(뭍과 섬을 이은 다리)다. 영도대교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1913년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조선소가 보인다. 영도는 19세기 말부터 근대어업과 해양산업의 중심지였다. 현재 국립해양대를 비롯해 국립해양박물관,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등 해양수산부의 수많은 산하기관이 자리 잡고 있어 부산 해양문화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영도는 작은 섬이지만 13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화된 섬이다. 제주 출신 해녀 100여 명이 물질을 한다. 필자는 제주해녀들이 영도에서 처음으로 물질을 시작한 중리 해녀촌으로 향했다.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관광객에게 파는 곳이다. 그녀들이 영도로 이주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한마디 건넨 후 더 이상 말을 붙일 수 없었다. “바쁜데 그런 걸 왜 묻느냐”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위축됐다. 80세 전후의 노인들이지만 평생 바다에서 삶을 이어온 강인함은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을 내뿜었다. 70대 중반에서 80대 초반의 할머니 해녀들은 지금도 매일같이 물질을 나간다. 제주를 떠나 50여 년을 반복해 온 삶이다. 채취한 해산물은 곧바로 해녀촌으로 가져와서 관광객에게 판다. 과열 경쟁을 막기 위해 해녀촌 입구로 손님이 들어오는 순서대로 돌아가며 받는다. 해삼, 멍게, 소라 등을 주문해 먹으면서 겨우 할머니 해녀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제주해녀의 육지 이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00여 년 전 제주 상황을 살피는 것이 우선이다. 제주해녀들이 바깥 물질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다. 19세기 후반부터 간헐적으로 바깥 물질이 이뤄졌으나, 1910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전 1890년대부터 일본의 잠수기 어선 수백 척이 제주 어장을 황폐화시켰다. 채취할 해산물이 부족해지자 해녀들은 육지로 눈을 돌렸다. 이때 가장 중요한 해산물은 전복, 해삼 등이 아닌 우뭇가사리였다. 1916년 미역 가격의 66배, 1930년대에는 무려 1000배에 이르렀다. 우뭇가사리는 가공식품 재료와 공업용 원료로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제주해녀들은 경상, 전남 해안을 중심으로 물질을 했으나 일부는 강원도, 함경도, 황해도 해안까지 올라갔다. 이때 해녀들을 모집하여 바깥 물질을 촉진하는 역할을 해산물 중개상인인 객주가 했다. 객주는 부산 영도 등지를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했다.

제주해녀의 육지 해안 정착에 가장 큰 역할을 한 해산물은 미역이다. 1960, 70년대 중반까지 돌미역 채취를 위해 필요한 해녀를 어촌 주민들이 제주에 가서 데려왔다. 이들을 해녀사공이라 했다. 육지로 나온 출향 해녀는 2월 말부터 추석 전까지 물질을 하고 제주로 돌아갔다. 조용하던 어촌에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의 해녀가 몰려들었다. 물질을 하면서 육지 총각과 사랑이 싹트는 경우가 많았고, 육지 해안에 정착하는 해녀가 늘었다. 50년 후, 그녀들은 할머니가 되었지만 지금도 부산의 바다를 호령하고 있다.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부산 바다#제주 할머니 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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