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영수회담’ 원점 [김지현의 정치언락]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2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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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영장 기각 후 병원으로 돌아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기력을 회복한 건지 추석 메시지를 빙자한 ‘영수회담’ 카드를 던졌습니다. 이 대표가 윤석열 대통령에게 회담을 제안한 건 지난해 8월 당 대표 취임 이후 벌써 8번째입니다. 유난히 영수회담에 집착해 온 이 대표의 관련 발언들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 이 대표는 전당대회에서 승리하던 당일 밤부터 영수회담을 요구했습니다.

“제가 먼저 정부·여당에 협력하겠습니다. 영수회담을 요청해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만들겠습니다.” (2022년 8월 28일 당 대표 수락 연설)
2) 성격도 급하게도 그 바로 다음 날 아침 첫 최고위원회의에서도 또 얘기했죠.

“윤 대통령에게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영수회담을 요청한다. 더 나은 당을 위해서라도, 현재 이 민생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한반도에 불안과 대결의 기운 완화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여야가 초당적으로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22년 8월 29일 최고위원회의)
3) 다음날인 8월 30일 이진복 대통령실 정무수석을 통한 윤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회동을 촉구했습니다. 당 대표 취임 후 3일 내리 만나자고 한 겁니다.

“가능한 한 빨리 형식과 절차에 구애받지 않고 만나면 좋겠다.” (2022년 8월 30일, 윤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
하지만 당시 통화에서 “당이 안정되면, 가까운 시일 내에 여야 당 대표들과 좋은 자리를 만들어 모시겠다”던 윤 대통령 대신 검찰에서 먼저 연락이 왔죠. 나흘 만인 9월 1일, 정기국회 첫날 이 대표에게 소환 통보장이 온 겁니다.

“국정이 아니라 사정이 목적이었던 (검찰) 총장 출신 속내가 드러났다. 제1야당 당 대표 소환한다는 사상 초유의 일을 정기국회 첫날 발표했다. 불과 (당 대표)직 맡고 나흘만이다.”(2022년 9월 2일 최고위원회의, 박홍근 전 원내대표)

4)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이 대표는 추석 직전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또다시 만남을 호소합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올해도 제1야당의 추석 메시지는 윤 대통령을 향했네요.

“대통령께 다시 요청드린다. 추석 직후에라도 바로 만나 지금 우리 정치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국민의 물음에 답해드리자.”(2022년 9월 8일, 페이스북)
5) 그러고는 5일 뒤 국회에서 열린 민생경제위기대책위원회 출범식 및 기자간담회에서도 또 제안하죠. 이쯤 되면 만나줄 법도 한데 윤 대통령도 대단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에 여야, 정파를 떠나 허심탄회하게 머리를 맞대고 논의할 수 있는 민생 경제 영수회담을 다시 한번 촉구한다. 절차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겠다.”(2022년 9월 13일)
취임 후 보름 동안 5번 이어진 그의 ‘구애’에 국민의힘은 “벌써 다섯 번째다. 제안이 거듭될수록 이 대표가 영수회담에 목을 매는 이유에 국민의 의구심만 커지고 있다” “민생을 위한 ‘영수회담’이라고 하지만, 민주당이 연일 확전하는 ‘이 대표 구하기 전쟁’을 보면 그 누구도 그것이 진심임을 믿을 수 없다” (박정하 수석대변인)이라고 비판했습니다.

6) 하지만 이에 멈출 이 대표가 아니죠. 그는 지난해 10월 화재 피해를 본 대구 매천동 농수산물 도매시장 화재 현장을 찾은 자리에서도, 윤 대통령에게 만나자고 합니다. 이 정도면 정말 회동 호소인입니다.

“민생 경제 위기 돌파를 위해 대통령이 직접 대화에 나설 것을 거듭 촉구한다.”(2022년 10월 28일, 대구 현장 최고위)

7) 새해에도 이 대표의 메아리 없는 외침은 이어졌습니다. 그는 올해 1월 신년 기자간담회에서도 윤 대통령에게 회담을 제안합니다.

“이미 여러 차례 대통령과의 회담을 제안했다. 그 제안은 지금도 유효하다.” (2023년 1월 12일)
여권에선 ‘싫다는데 왜 그러느냐’는 핀잔만 이어졌죠. 당시 국민의힘 원내대표였던 주호영 의원은 “대통령실에서 만날 계획이 없다고 수차례 말한 것으로 안다. 지금 이렇게 국정에 비협조적이고 대결 구도인 상황에서 만난다고 한들 무슨 결론이 있겠나. 본인 사법 수순에 대한 방탄 내지는 주의 돌리기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고, 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던 정진석 의원도 “대통령이 범죄 피의자와 면담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일축했습니다. 대통령실도 당일 브리핑에서 “영수회담에 대해선 여러 차례 입장을 밝힌 바 있다”면서 “국회 상황 등 여러 여건을 고려해 판단할 것”이라고만 했죠. 사실상 거부한 겁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추석 연휴 첫날인 9월 28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홍익표 원내대표와 면담을 하고 있다. 민주당 제공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추석 연휴 첫날인 9월 28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홍익표 원내대표와 면담을 하고 있다. 민주당 제공
8) 그 뒤로는 약 반년간 잠잠하던 이 대표가 딱 1년 만에 다시 ‘영수회담 승부수’를 꺼낸 겁니다.

“윤석열 대통령님께 민생 영수회담을 제안드립니다. 최소한 12월 정기국회 때까지 정쟁을 멈추고 민생 해결에 몰두합시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조건 없이 만나 민생과 국정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고, 할 수 있는 일들은 신속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민생 고통에 시달리는 국민들께서는 누가 더 잘하냐는 선의의 경쟁보다, 민생을 외면한 채 상대를 부정하는 전쟁 같은 정치가 불안하고 불편합니다.” (2023년 9월 29일, 페이스북)
대통령실은 이번에도 ‘무반응’이고, 국민의힘만 일제히 날을 세우고 있죠.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의 일방적 영수회담 제안 정치공세의 저의는, 또 다른 ‘방탄’ 전략임이 뻔히 보인다. 아직 벗어나지 못한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에 집중된 여론을 희석시키려는 얄팍한 속셈” (강민국 수석대변인)
“지금은 뜬금없는 영수회담을 제안할 시간이 아니라, 재판당사자로서 재판에 충실히 임할 시간입니다” (전주혜 원내대변인)
“외상값 맡겨 놓은 것처럼 재촉한다” (박대출 정책위 의장)
“굳이 이 대표가 윤 대통령을 만나려고 하는 것은 사법리스크를 완화해 보려고 하는 것일 뿐 민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홍준표 대구시장)

아직 이 대표가 재판 등 ‘사법리스크’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본인의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한 역전 카드로 회담을 고집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에 민주당은 “‘민생’을 챙기자는데, 여당은 고장 난 레코드처럼 ‘방탄’ 타령만 되풀이하며 정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민생회담’ 제안이 이렇게까지 벌떼처럼 달려들어 거부할 일인지 의아스럽다”(권칠승 수석대변인)라며 반발했고요. 딱 1년 전으로 그대로 돌아간 느낌입니다.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 1989년 3월 10일 오후 청와대 회담이 끝난 뒤 여의도 당사에 돌아와 당직자 및 당원들에게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 1989년 3월 10일 오후 청와대 회담이 끝난 뒤 여의도 당사에 돌아와 당직자 및 당원들에게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사실 영수(領袖)회담은 요즘은 잘 안 쓰는 표현입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옷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위인 ‘옷깃(領)’과 ‘소매(袖)’, 즉 ‘우두머리’들끼리 서로 만나 의제를 갖고 대화를 나눈다는 건데,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직하던 권위주의 시대의 산물 중 하나로 여겨져왔죠. 이 때문에 ‘당·청 분리’를 선언한 노무현 전 대통령 때부터는 ‘당 대표 회담’, ‘여야 대표 회담’ 등의 표현으로 대신해왔습니다.

다만 이 용어를 둘러싼 입장은 각자가 여야일 때에 따라 매번 뒤바뀌어 왔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인 2011년 청와대가 “앞으로 영수회담이 아니라 ‘청와대 회동’으로 표현하기로 했다”고 하자,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에선 “영수라는 것은 각 진영의 우두머리를 뜻하는데 이를 굳이 청와대 회동이라 부르려는 건, 야당 대표를 대통령과 동격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각이 반영된 것”이라고 반발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던 민주당은 자신들이 2019년에 여당이 되고는 입장을 바꿨죠. 홍익표 당시 대변인(현 신임 원내대표)은 영수회담을 제안하는 자유한국당(당시 야당) 황교안 대표를 향해 “영수회담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특히 제왕적 총재가 있을 때 했던 방안”이라며 “우리는 그런 방식은 아니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이처럼 영수회담은 시작 전 기싸움만 팽팽할 뿐, 막상 열리고 나면 별 성과 없이 서로 감정만 상한 채 끝나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결국 보여주기식 정치쇼라는 거죠. 지난 역사 속에서도 지지율 하락이나 정치적 위기 등에 몰린 쪽에서 만남을 먼저 줄기차게 요구한다는 점만 봐도 충분히 예상되는 결과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7차례 영수회담을 했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그간 몇 차례의 영수회담 뒤 돌아온 것은 후회와 분노, 통탄뿐”이라고 회고했고, 2005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 간 2시간 반 동안의 회담도 성과 없이 사실상 결렬됐습니다. 2011년 지지율 정체 속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온 손학규 당시 민주당 대표는 “소득 없는 빈손 회동”이었다며 오히려 당내에서 거센 역풍을 맞기도 했고요.

2000년 4월 24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영수회담을 위해 청와대를 방문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 웃으며 악수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2000년 4월 24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영수회담을 위해 청와대를 방문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 웃으며 악수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2005년 9월 7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청와대에서 회담을 하는 모습. 두 사람은 2시간 반 동안의 회담 끝에 성과 없이 사실상 결렬을 선언했다. 동아일보 DB
2005년 9월 7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청와대에서 회담을 하는 모습. 두 사람은 2시간 반 동안의 회담 끝에 성과 없이 사실상 결렬을 선언했다. 동아일보 DB
이명박 전 대통령과 손학규 당시 통합 민주당 대표가 2008년 5월 20일 오전 청와대에서 회담을 위해 회의장으로 들어서는 모습. 동아일보 DB
이명박 전 대통령과 손학규 당시 통합 민주당 대표가 2008년 5월 20일 오전 청와대에서 회담을 위해 회의장으로 들어서는 모습. 동아일보 DB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재명 대표도 윤 대통령의 답만 기다리며 ‘영수회담 호소인’을 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자신의 체포동의안 가결 사태 이후 누적된 당내 갈등을 봉합해야 하는 게 더 우선이 아닐까 싶네요. 대통령을 향해 왜 안 만나주냐고, 협치는 포기했느냐고 따지기 전에 집 안 통합부터 하시는 게 효율적일 듯합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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