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문제에 끼어드는 진영논리[오늘과 내일/김용석]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2일 21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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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먹거리 책임질 미래산업
5년짜리 시한부 만들어서야

김용석 산업1부장
김용석 산업1부장
작년에 읽은 드라마 비평 중 가장 후지다고 생각한 글이 있다. 우연히 읽었는데 당시 인기를 끈 ‘재벌집 막내아들’에 대한 평이었다. 재벌이 가진 경제적 모순을 드러내 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극 중 ‘순양그룹 창업주 진양철 회장’ 역 이성민 배우가 너무 연기를 잘하는 바람에 오히려 재벌이 지지와 호감을 얻게 됐다며 안타까워하는 내용이었다.

이성민 배우가 좋은 연기로 사람들에게 감동과 공감을 주는 순간마다 그 비평가가 애태우며 분노했을 걸 생각하니 모든 것을 흑백으로 가르는 진영 논리가 얼마나 사람에게 큰 해악을 미치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진영 논리에 빠진 사람은 세상을 흑백으로 가르고 싶겠지만 실제 세상은 흑과 백이 뒤섞여 있다. 진영 논리가 개인 의견을 담은 주장 글이나 여의도의 정쟁에만 머무른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산업계 곳곳에 탄소중립 기술과 산업이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최근 부산에서 기후산업국제박람회가 열렸다. ‘2030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해 국내 산업계는 전 지구적 문제를 푸는 한국기업의 글로벌 리더십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국내 기후산업 기술을 선보이는 박람회는 엑스포 유치의 중요한 포석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이 행사에 대통령이 아닌 국무총리가 참석한 데 대해 관련 업계에서는 탄소중립이 지난 정권을 연상시키는 이슈이기 때문 아니겠느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3일간 열린 박람회 내내 행사장이 썰렁했다는 후문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기업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는 데 있다. 최근 한 기업에 “요즘은 수소 관련 사업을 왜 열심히 안 하냐”고 물으니 “이번 정부에선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미국 유럽 주요국 시장에선 탄소중립 기준을 준수하지 않으면 물건을 팔기 어렵게 하는 규제를 도입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2026년부터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통해 탄소 배출량이 많은 제품을 수입할 때 기준치를 넘긴 배출량에 대해 수입업자가 비용을 더 내도록 했다. 사실상 추가 관세이자 무역 장벽이다. 미국도 전기차 등 무공해 차량 보급을 중심으로 탄소 규제 강화에 나섰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기후정보공시 규정 시행 등 자본시장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탄소중립이 더 이상 이념을 가르는 주제가 아니라 먹고살기 위한 과제가 됐다고 보는 이유다. ‘탈원전은 우리 편, 친원전은 남의 편’이라는 식으로 에너지 정책을 진영 논리에 집어넣은 것은 지난 정권의 탓이 크다. 그 과정에서 과학이 채워야 할 자리를 진영 논리가 차지하는 것을 방조하거나 유도했다.

그러나 정부가 지난 정권 반대편에서 선명성을 드러내고 차별화하는 것으로는 정쟁에서 이길 수 있지만 먹고사는 문제, ‘먹고사니즘’ 투쟁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정책 리더십 측면에서도 해악이 적지 않다. 언젠가는 ‘전 정권’이 될 정부의 주요 과제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벌였다간 뒷감당이 어려워진다는 교훈이 공직사회의 역동성을 떨어뜨린다. 기업인들 사이에선 주력 사업이 특정 정부의 역점 사업이 되면 피곤해진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런 건 문제가 있다. 정치권력은 5년마다 바뀌지만 먹고사는 문제는 최소한 수십 년을 바라보고 꾸준히 한 길을 가야 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
#진영논리#미래산업#먹고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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