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9년 황윤석 ‘한양 집구하기’… 1633년 오달제 ‘과거시험 답지’
한중연 장서각 연구원 8명
왕실 문헌-양반편지-노비문서 등 사료 29만점서 ‘조선의 일상’ 정리
29만8092점.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의 장서각 수장고에 있는 일제강점기 포함 조선시대 사료 수다. 종류도 다양하다. 왕실 문헌만 12만여 점이 소장돼 있으며, 노비문서나 양반들이 주고받은 편지, 유서 등 민간 고문헌도 17만여 점이나 된다.
10일 출간된 ‘고문헌에 담긴 조선의 일상’(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은 정수환 고문서연구실장(48) 등 장서각 소속 연구원 8명이 방대한 자료 가운데 조선의 일상이 잘 드러나는 내용들을 정리한 책이다. 한중연에서 22년째 고문헌을 탐구해온 정 실장은 20일 전화 통화에서 “고문헌이 딱딱한 한문만 가득할 것 같지만, 실은 사람 사는 냄새가 진득하게 담겨 있다”며 웃었다.
정 실장이 추천한 대표적인 사료는 실학자 황윤석(1729∼1791)이 8세부터 62세까지 쓴 일기 ‘이재난고(이齋亂藁)’다. 모두 46권인데, 그중 한 권은 18세기 중엽 한양의 주택시장에 대한 ‘깨알 정보’가 가득하다고 한다.
고향인 전북 고창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황윤석은 1769년 마흔 살에 승진해 한양에서 왕실 족보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게 됐다. ‘서울 직장생활’을 위해 고향 땅을 판 40냥을 들고 사대문 안에서 열심히 발품을 팔지만 작은 집 한 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황윤석은 내 집 마련이란 꿈을 포기하게 됩니다. 한양에 집을 못 구해 하숙생으로 지내게 되죠. 예나 지금이나 지방 사람에게 ‘서울살이’는 힘들었던 거죠.”
고문헌 탐구는 역사적 인물의 면모를 들여다보는 풍부한 단서도 제공한다. 병자호란 때 청에 끌려가 목숨을 잃은 ‘삼학사(三學士)’ 가운데 하나인 오달제(1609∼1637)가 그랬다.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청과의 화의에 반대했던 기개는 그가 남긴 ‘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에 잘 드러난다.
“문집에 1633년 오달제가 24세에 응시한 과거시험 답지가 나와요. 당시 문제가 국가재정 확보를 위해 준비하던 ‘동전’을 유통할 좋은 방법을 서술하라는 거예요. 근데 오달제는 ‘동전을 만드는 게 임금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려는 것인지 민초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를 되레 따져 묻는 답을 씁니다. 국가시험 응시생이 정부가 시행하려는 정책의 유해성을 지적하고 나선 거죠. 그의 곧은 성정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정 실장은 “이처럼 ‘임자’를 기다리는 고문헌은 무궁무진하다, 별것 아닌 조선의 낙서에서 당대의 유머 코드를 읽어낼 수도 있다”며 “수많은 사료에서 진짜 ‘이야기’를 찾아내는 건 후손들이 해야 할 큰 숙제”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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