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세인 요르단 국왕에게 전화할 것 2) 무사 리비아 정보국장에게 전화할 것 3) 제시 헬름스 상원의원에게 전화할 것 4) 다른 의원들에게도 전화 돌릴 것 5) 중국과의 회담 준비 6) 무지방 요거트 살 것 |
최근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이 별세했습니다. 대다수 직장인들처럼 그녀도 장관 시절 하루 주요 일정을 포스트잇에 적어서 집무실 책상에 붙여놓았다고 합니다. 자서전 ‘마담 새크리터리’에 소개된 1998년 1월 28일 일정입니다. 자서전에 나온 올브라이트 장관의 설명에 따르면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날이라는데 미국 외교의 책임자답게 빡빡한 일정입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자서전 ‘마담 새크리터리’

부부는 별거에 들어갔습니다. 남편의 결정력 장애는 이혼 과정을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남편은 올브라이트 장관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 “이혼을 할지 말지 망설여진다”며 하소연을 했습니다. 당시 퓰리처상 후보로 올라있던 남편은 “상을 타면 이혼을 안 하고, 상을 못 타면 이혼을 하겠다”는 해괴한(?) 조건까지 내걸었습니다. 퓰리처상 수상이 불발로 돌아갔기 때문인지 1982년 부부는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이혼이 많은 미국이지만 공직에 진출한 정치인들은 원만한 결혼생활이 성공의 잣대가 되기 때문에 쉽게 이혼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생 중반인 45세에 이혼을 택한 올브라이트 장관은 “이례적인 케이스”이라고 뉴욕타임스는 최근 그녀의 부고 기사에서 전했습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이혼 후 커리어의 꽃을 피웠습니다. 워싱턴에서 발이 넓은 남편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이뤘습니다.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된 계기는 이혼 이듬해인 1983년 최초의 여성 부통령 후보였던 제럴딘 페라로 하원의원의 ‘과외 선생’으로 영입되면서부터입니다.

페라로 후보는 대선 TV 토론에서 조지 H W 부시 부통령과 대결하며 까다로운 핵관련 이슈들도 척척 받아넘겼습니다. 올브라이트 장관의 주가도 함께 올랐습니다. 이후 조지타운대에서 테뉴어(종신교수직) 심사를 통과했습니다. 그녀의 이름 옆에 빨간 동그라미를 쳐가며 능력을 눈여겨보던 빌 클린턴 대통령은 1992년 당선 후 인수위원회 외교정책 담당 자리를 맡겼습니다. 클린턴 행정부 출범과 함께 유엔주재 미국대사, 국무장관에 오르며 자신의 목표를 이뤘습니다.
과외 공부를 계기로 알게 된 올브라이트 장관과 페라로 의원은 평생 친구가 됐습니다. 훗날 페라로 의원은 올브라이트 장관에 대해 “가르칠 자료들로 터질 듯한 가방을 들고 비행기 트랩까지 나를 마중 나올 정도였다”며 “이런 열성의 뒤편으로 이혼 후 복잡한 심경을 정리하려는 결심이 보였다”고 회고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올브라이트 장관은 홀로서기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판단이 서자 결혼시절 쌓은 인맥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남편과 함께 접대했던 지식인 친구들에게 다시 연락을 해서 자신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올브라이트 외교 디너(Albright Foreign Policy Dinners)’는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지인들끼리 모이는 소규모 토론회였지만 워싱턴에서 진지하게 정책을 토론할 수 있는 자리라는 명성을 얻게 됐습니다. 이 모임이 입소문을 타면서 올브라이트 장관은 페라로 후보의 과외교사로 추천을 받게 되고 이후 독보적인 외교 커리어를 개척하는 데 발판이 됐습니다.
개인사에 대한 얘기를 꺼리는 올브라이트 장관은 1999년 한 강연에서 “이혼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덕분에 오늘 여러분 앞에서 박수를 받는 위치에 서게 됐다”는 농담으로 좌중을 웃겼습니다. 인생에서 이혼을 포함한 여러 고난을 만나게 되지만 이를 통해 자유로워지는 부분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그것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위한 결정을 하는 삶을 사는 기쁨”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