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쿵, 외다리 귀신이 쫓아오면…’ 조선에 역병 돌자 괴담 성행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7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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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괴담으로 보는 ‘역병의 시대상’

조선시대 사람들은 ‘석조약사여래좌상’(왼쪽 사진)과 ‘대신마누라도’(오른쪽 사진)를 보며 역병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려고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조선시대 사람들은 ‘석조약사여래좌상’(왼쪽 사진)과 ‘대신마누라도’(오른쪽 사진)를 보며 역병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려고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조선시대 ‘대신마누라도’는 머리에 가채를 올린 푸근한 인상의 귀부인을 연상시킨다. 대신마누라는 이 시대 최악의 역병이던 호구마마(천연두)를 물리치는 신으로 여겨졌다. 병과 고통에서 중생을 구원하는 약사여래를 묘사한 ‘석조약사여래좌상’도 백성들이 감염병의 공포를 이기는 수단이 됐다.

두 유물은 팬데믹 와중이던 지난해 5월 열린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선, 역병에 맞서다’ 전시에서 공개됐다. 이 전시에는 1774년 무과 합격자 18명의 초상화를 모은 등준시무과도상첩(登俊試武科圖像帖)도 나왔다. 18명 중 3명의 초상화에서 천연두를 앓은 얼굴 흉터가 확인될 만큼 천연두는 조선 사회를 휩쓸었다. 조선시대 역병에 대한 두려움은 괴담으로도 발전했다. 괴담에는 역병에 대한 인식과 대처 등 조선시대의 사회상이 담겨 있다.

조선 광해군 때 문신 유몽인(1559∼1623)이 17세기 초에 저술한 어우야담(於于野譚)에는 유생 박엽의 역병에 얽힌 괴담이 실려 있다. 1594년 4월 박엽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지방으로 피란을 떠났다가 한양으로 돌아왔다. 옛집은 쑥대밭이 돼 있었고, 거리는 굶거나 역병에 걸려 죽은 시신들로 가득했다. 정처 없이 떠돌던 박엽은 밤거리에서 선비 집안의 미녀를 만났고, 그의 집에서 술에 취해 잠들었다. 다음 날 잠에서 깬 박엽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옆에 어젯밤 만난 미녀의 시신이 누워 있었던 것. 집안 곳곳엔 미녀 가족들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정신을 차린 박엽은 관을 갖춰 시신을 수습한 후 제사를 지낸다. 박엽 괴담에는 전란 후 역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간 백성들의 참혹한 현실이 그려져 있다.

실제로 선조실록에는 1594년 흉년으로 일부 백성들이 서로를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권혁래 용인대 교양교육원 교수는 올 3월 발표한 논문 ‘17세기 재난문학 어우야담을 통해 보는 재난상황과 인간존중 정신’에서 “어우야담의 괴담은 흉년으로 인한 참상을 기술하고 위정자들이 하늘의 뜻을 살펴 재해를 대비하도록 촉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조선후기 야담집인 청구야담(靑丘野談)에는 역병을 퍼뜨리는 외다리 귀신이 비를 피하기 위해 ‘도롱이와 방립’을 입은 채 한 여성을 쫓는 괴담이 수록돼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조선후기 야담집인 청구야담(靑丘野談)에는 역병을 퍼뜨리는 외다리 귀신이 비를 피하기 위해 ‘도롱이와 방립’을 입은 채 한 여성을 쫓는 괴담이 수록돼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19세기 중엽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작자 미상의 청구야담(靑丘野談)에도 역병을 다룬 괴담이 전한다. 비가 내리던 밤 영의정을 지낸 이유(1645∼1721)는 종묘 근처에서 비릿한 냄새에 발길을 멈췄다. 이윽고 불처럼 이글거리는 눈으로 방립(비를 피하기 위한 갓)을 쓰고 도롱이(짚을 엮어 만든 비옷)를 입은 채 외다리로 뛰는 사람이 한 가마를 따라가는 모습을 봤다. 외다리치곤 믿기지 않는 빠른 속도에 느낌이 이상했던 이유는 뒤를 쫓았다. 가마에 탄 이는 괴질에 걸린 이유의 친척 며느리였다. 이유는 이윽고 외다리 귀신이 며느리 옆에 있는 걸 발견했다. 이유가 귀신의 눈을 노려보자 귀신은 방에서 뛰쳐나갔고 며느리는 건강을 되찾았다.

이유의 괴담에서는 역병이 귀신으로 형상화됐다. 박수진 성결대 강사는 논문 ‘조선후기 야담집에 나타난 역병의 형상화 양상과 그 의미’에서 “역병을 귀신 이야기로 그려 인간이 귀신을 쫓아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역병 같은 문제를 개인들이 직접 해결한다는 것이다. 현혜경 한경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는 “기근, 질병처럼 국가가 해결해야 할 대규모의 사회 문제가 괴담을 통해 개인적 차원에서 비현실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이 모색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역병의 시대상#대신마누라도#천연두 퇴치신#청구야담#역병 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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