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유혹에 약한 눈과 귀여![클래식의 품격/나성인의 같이 들으실래요]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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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의 ‘리골레토’ 성악보 표지 삽화. 1852년.
베르디의 ‘리골레토’ 성악보 표지 삽화. 1852년.
나성인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
나성인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
시원한 파바로티의 목소리 때문일까. 아니면 모 기업의 기발한 광고 덕분일까.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에 나오는 ‘여자의 마음’은 취향을 떠나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오페라 아리아가 되었다. 우리말로 번안해 불러도 어색함이 없는 선명한 선율, 상쾌하고 흥겨운 삼박자의 리듬은 듣는 이를 금세 따라 부르게 할 만큼 자연스럽다.

그러나 사실 오페라 내용을 알고 나면 결코 마음 편하게 들을 수 없는 게 또한 이 아리아다. 이 호방한 노래를 부르는 만토바 공작은 난봉꾼이다. 그저 술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는 바람둥이쯤이 아니라 자기 욕망에 충실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을 노리개로 이용하는 악역이다. 자그마한 만토바 땅덩어리에서 그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는 여인은 없었고, 그는 심지어 심복이자 한패인 광대 리골레토의 딸마저 유혹하여 쟁취한다.

그러나 리골레토의 딸 질다에게 사랑은 한순간의 놀이가 아니었다. 세상이 감당 못 할 순수의 표상인 그녀는 이용당하는 줄도 모른 채 일편단심 사랑을 바친다. 보다 못한 광대가 공작의 정체를 폭로하려고 나선다. 공작이 또 다른 여인을 유혹하는 현장으로 딸을 데려간다. ‘여자의 마음’은 바로 그곳에서 부르는 노래인 것이다.

‘여자의 마음’ 뒤에는 오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중창 ‘사랑의 아름다운 여인이여’가 이어진다. 한쪽에서는 만토바 공작이 새로운 여인 마달레나를 유혹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충격에 빠진 질다와 복수를 결심하는 아버지 리골레토가 노래한다. 네 사람 모두가 자기 상황에 더없이 충실하다. 공작은 최선을 다해 유혹한다. 그가 유혹하고 있는 여인 마달레나는 다음 장면에서 자기를 죽일지도 모르는 청부살인업자(스파라푸칠레)의 여동생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르지만 관객은 알아차리는 기묘한 긴장감이 무대에 흐른다. 유혹에 실패하면 공작은 죽을 운명인 것이다. 관객들도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테너 목소리의 유혹을 함께 받는다. 아, 공작은 나쁘고 질다는 착하다. 그걸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아름답게 반짝이는 악의 목소리(테너), 리드미컬하게 유혹을 즐기는 경박한 장난의 목소리(메조)가 전면에 부각되고, 슬픔과 외마디 탄식을 부르짖는 순수의 목소리(소프라노)나 정의에 호소하는 아버지의 분노의 목소리(바리톤)는 뒤에 물러나 있다. 어디에 감정을 이입해야 하는가. 이 기묘한 네 목소리가 이루는 절묘한 앙상블은 관객들을 어쩔 줄 모르게 만든다.

유혹과 장난질과 슬픔과 복수심이 하나로 엮인 이 음악은 한 가지 진실을 말해준다. 우리의 눈과 귀는 얼마나 유혹에 약한가. 때때로 들어야 할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힘과 매력을 갖춘 악이 진실을 가려놓는 까닭이다. 갈대와 같은 것은 여자의 마음이 아니다. 유혹에 흔들려 선량한 약자의 목소리를 잊는다면, 그런 귀, 그런 마음이 곧 갈대인 게 아닐까.

나성인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품격#파바로티#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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