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CEO의 자발적 퇴사 예고[오늘과 내일/하임숙]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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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처벌법으로 감방 가느니 그만둔다”
사고 줄이려면 처벌보다 안전투자 유도해야

하임숙 산업1부장
하임숙 산업1부장
그는 내년에 대표이사 3년 차에 접어든다.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도 불구하고 반도체나 플랫폼 회사처럼 좋은 실적을 올린 곳도 많지만 이 회사는 그야말로 죽음의 레이스를 펼쳤다. 그래도 고비를 잘 넘겨 이제는 좋아질 일만 남았다는 게 이 대표의 판단이다. 하지만 그는 내년에 임기가 만료되면 후년엔 ‘반드시’ 물러나겠다고 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때문이다.

“후배들에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 회사가 벌이고 있는 건설 현장이 40∼50개다. 하루에 투입되는 인력이 3만여 명, 해외까지 합하면 7만 명이다. 그 모든 인력을 대표가 어떻게 책임지나.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법이다.”

정의당, 더불어민주당만 아니라 국민의힘까지 관련법안을 발의해 현재 국회에 계류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안만 5개다. 핵심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대표이사에게 최소 2∼5년의 징역형을 가한다는 것이다. 여당은 이 법을 통과시키려는 절차에 착수했다.

이 대표는 해당 법이 통과되면 1년가량 유예기간을 둘 텐데, 마침 그 기간이 자신의 임기와 일치하니 회사가 1년을 더 하라고 붙잡든 말든 이제는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말년에 1년 더 욕심 부리다가 감방 갈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현장에서 중대 사고가 일어나는 걸 막아야 한다는 건 분명하다고 했다. 처음 임원이 됐을 때 맡았던 업무가 안전담당이었기에 그 중요성을 더 잘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고는 아무리 조심해도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고 했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독일군이 포로가 된 유대인을 감시하기 위해 포로 수만큼 감시병을 늘렸지만 유대인들의 탈출을 막을 수 없었듯이 일대일로 안전관리를 해도 사고는 어느 순간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사고는 줄이는 게 최선이고, 그러려면 대표의 처벌이나 벌금형 강화가 아니라 비용을 들여 안전을 확보하도록 시스템을 만들고, 이를 잘 지키도록 근로자 본인에 대한 교육도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왜 모르느냐고도 했다.

“다른 걸 떠나서 최소 징역형을 정하는 법, 그것도 대표의 책임범위가 모호해 뭘 어떻게 어기면 법 위반인지도 모르겠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대표에 대한 처벌의 상한 범위를 두는 법이 이미 많고, 그것도 충분히 위협적이지만 사고 발생 시 무조건 형을 살도록 최소 형량을 정해두는 법은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라고 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건 중소기업이다. 중소기업은 오너가 바로 대표인 경우가 많은데 오너가 구속되면 회사 문을 닫아야 하는 경우까지도 생길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대기업과는 달리 중소기업은 사람, 특히 결정권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중소벤처기업부는 “다른 법령과의 균형에 맞게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며 사실상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법무부는 “중대재해의 피해 정도를 구분하지 않고 사망 시 일률적으로 유기징역의 하한을 둔 것은 과도하다. 법원이 중대재해 발생 법인에 전년도 매출의 10%까지 벌금을 부과하게 한 것, 영업정지 허가취소 등을 결정하게 한 것도 행정 제재를 법원이 결정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3권 분립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봤다. 법원행정처도 “헌법상 과잉금지 원칙 위반 소지가 있다”고 했다. 이런 모든 합리적 지적에도 불구하고 이 법안은 통과를 위한 절차에 들어가 있다.

안 그래도 기업 대표를 형사처벌하는 법이 우리나라엔 너무 많다. 작년까지 2657개였고, 21대 국회 들어 발의된 법안 중 처벌을 신설 또는 강화한 법이 117개나 된다. 샐러리맨들의 최종 목표, 꿈의 지향점이 어쩌다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자리가 됐나.

 
하임숙 산업1부장 artemes@donga.com
#중대재해처벌법#형사처벌#기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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