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지기를 꿈꾸던 화가 친구에게[김창일의 갯마을 탐구]〈54〉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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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송일만 어귀에서 대형 수송선박들은 만의 양쪽 돌출부에서 바다 한가운데로 뻗어나온 방파제 끝의 좌록우적(左綠右赤) 무인등대 사이를 통과했다.” 김훈의 단편소설 ‘항로표지’의 문장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고개를 갸웃한 적이 있다. 왜 좌록우적(왼쪽에 녹색, 오른쪽에 적색)이라고 했을까? 방파제에 있는 등대는 흰색과 빨간색이지 않은가. 어촌문화를 조사하기 위해 새벽에 어선을 타고 다니면서 알게 됐다. 좌록우적은 등대 불빛 색깔이라는 것을. 낮에는 건축물의 도색으로, 밤에는 불빛으로 항로를 표시한다. 항구로 들어오는 배에 탄 사람의 시선으로 봤을 때 왼쪽은 흰색 등대로 녹색 불빛, 오른쪽은 빨간색 등대이며 적색 불빛이다. 좌록우적이 맞다. 도색과 불빛은 국제적으로 표준화된 규칙이다.

항만이나 방파제에 있는 등대는 항구의 위치와 입출항 경계를 표시한다. 입항할 때 흰색 등대의 오른쪽으로, 빨간색 등대의 왼쪽으로 운항하라는 뜻이다. 섬이나 해안가 언덕, 절벽 등 높은 곳에 있는 등대는 육지나 섬의 위치를 알려준다. 그래서 신호를 멀리서 볼 수 있게 높은 곳에 세운다. 간혹 노란색 등대를 볼 수 있는데 주변에 암초 등 위험물이 있음을 경고한다. 등대는 일종의 신호등으로 해상 항로표지다. 그래서 등대지기의 공식 직함도 ‘항로표지원’이다.

세종실록에 태안군 가의도리 해상에 지방수령이 향도선을 배치해 세곡선이 통과할 수 있도록 했다는 항로표지에 관한 기록이 있으나, 한반도에서 등대 건설은 일제 침략과 관련된다. 팔미도등대(1903년)가 처음으로 불을 밝힌 이후 부도등대(1904년), 거문도등대(1905년), 울기등대(1906년), 옹도등대(1907년), 호미곶등대(1908년), 가덕도등대(1909년), 죽변등대(1910년) 등이 줄줄이 만들어졌다. 지금은 3000여 곳에 등대가 있어 한국의 밤바다를 밝히고 있다. 사람들이 자주 접하는 방파제의 등대는 모두 무인으로 운영되며, 섬이나 해안가 절벽에 있는 몇몇 등대에 등대지기가 남아있다. 원격제어 시스템을 활용한 무인화가 진행됨에 따라 항로표지원은 점차 줄어들어 현재 유인등대는 30여 곳에 불과하다.

어느 날 화가 친구와 해변가에서 등대지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외딴섬에서 등대지기로 그림 그리고, 책 읽으며 살고 싶다고 했다. 등대가 무인화되면서 꿈이 사라졌다며 한탄했다. 꿈을 이야기하는 친구 앞에서 현실을 말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못다 한 말이 있다. 등대지기라는 낭만적인 이름 이면에는 고립된 섬에서 평생을 그리움과 싸우는 현실이 놓여있음을. 김훈의 소설에서 등대지기 주인공이 섬을 떠나듯 고독을 이기지 못해 그만두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 삶, 태풍이 불거나 기상이 악화되면 식료품 공급조차 지연되는 오지의 불편함. 등명기 정비, 비상발전기와 발전용 유류 관리, 해상 상황 보고, 기상청과 연계해 기상정보 전송, 조류 방향과 유속, 파고 정보를 운항하는 선박에 제공하는 등 생각처럼 그림 그리고, 독서할 여유가 많지 않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친구의 말대로 이제 항로표지원이 되는 것은 무척 어렵게 됐다. 빛을 향해 귀향하는 선박을 가장 앞서 맞이하고, 먼 바다로 나아가는 배를 빛으로 전송하는 등대지기. 그들은 외로움을 빚어 밤바다의 빛을 만드는 사람이다.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등대지기#화가#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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