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사진, 툭 찍은 사진[사진기자의 ‘사談진談’]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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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이른바 ‘로드니 킹 사건’으로 일어난 미국 LA폭동 당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총을 쥐고 옥상으로 올라갔던 ‘루프 코리안’의 모습. 사진은 기억을 소환한다. 강형원 전 LA타임스 기자 제공
1992년 이른바 ‘로드니 킹 사건’으로 일어난 미국 LA폭동 당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총을 쥐고 옥상으로 올라갔던 ‘루프 코리안’의 모습. 사진은 기억을 소환한다. 강형원 전 LA타임스 기자 제공
변영욱 사진부 차장
변영욱 사진부 차장
올해 5월 미국에서 흑인이 경찰에 의해 목이 눌려 사망하자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확산됐다. 현지에서 가게를 하는 한국인들에 대한 걱정이 이어지면서 우리나라 SNS에는 ‘루프 코리안(roof Koreans)’이라는 설명과 함께 다수의 사진이 유행했다. 199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 당시 총을 들고 옥상에 올라가 자신들의 가게를 지키는 교민들의 모습이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완벽한 구도와 시간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사진의 질 때문에 출처가 궁금했다. 본보 사진기자들의 인터넷 블로그에 사진을 소개하겠다는 후배에게 원작자를 찾는 노력을 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을 했다. 후배는 사진 중 일부의 원작자가 강형원 사진기자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e메일을 통해 사진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세상의 결정적 순간을 기록하고자 했던 사진기자 초년 시절 미국 신문사와 통신사에서 활동하는 강 기자는 나의 롤모델에 가까웠다.

강 기자는 후배로부터 안부를 전해 들었다며 페이스북 메신저로 연락을 해왔다. 그는 요즘 포토저널리즘을 어떻게 즐기고 있느냐고 질문했다. 전통적인 개념의 보도사진을 찍어 보도하는 일이야 특별한 게 아닐 것 같아 ‘고양이눈’이라는 칼럼 연재를 총괄하고 있다고 답했다. 막상 이렇게 답하고 나니 ‘고양이눈’이란 게 과연 중요한 사진은 맞는지, 강 기자의 루프 코리안 사진처럼 시간이 지나도 누군가에게 잊혀지지 않고 다시 소환될 수 있는 기록인지 궁금했다.

‘고양이눈’은 2018년 3월부터 본보 지면에 매주 5번씩 연재되고 인스타그램에도 꾸준히 업로드되는 사진 칼럼이다. 신문의 1면이나 사회면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세상의 단면이나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다. 격렬한 현장을 뛰어다니는 사진기자들이 취재 중간중간 찍거나 가족 여행 등에서 발견한 장면 등으로 채워진다. 아예 시간을 내서 소위 그림이 될 것 같은 현장으로 가서 취재하기도 하고 가끔 독자들이 보내준 사진을 올리기도 한다. 신문 뉴스 사진으로는 어색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시각의 사진을 보여주는 데 주로 초점을 맞춘다. 세상의 이면을 때론 봄날 고양이처럼 여유 있게, 때론 날카롭게 응시하는 사진 칼럼이라는 취지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정된 지면에 특별한 메시지도 없는 사진을 그렇게 크게 쓰냐면서 어색해하는 사진기자들도 꽤 있었다.

신문사에서 칼럼이 흥망성쇠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이 코너가 2년 이상 이어진다는 것은 사진을 찍는 사람과 사진설명을 다는 기자, 지면을 편집하는 기자들의 노력을 독자들이 인정한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세상의 트렌드에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진기자도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던 ‘툭 찍는 사진’이 왜 독자들의 호응을 받는지 생각해봤다. 회사 근처 건물 외벽에 커다랗게 붙은 한 외국 스마트폰 광고판을 보면서였다. 울트라와이드 렌즈 기능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람보다 훨씬 큰 애완견, 자전거 몸체보다 큰 타이어. 그야말로 어색한 사진이지만 왜 저 회사는 저런 기능을 마케팅 포인트로 잡고 사람들의 지갑을 노리고 있는 걸까. 우리 눈은 보통 고개를 돌리지 않은 상태에서 46도 각도로 세상을 보는데 와이드 렌즈들은 100도로 세상을 본다. 그만큼 넓게 보는 반면 만약 피사체의 일부에 근접한다면 그 부분이 어마아마하게 커져서 실제와는 다른 왜곡된 화면이 만들어진다.

예전에는 어색했을 시각과 장면에 사람들은 오히려 친근감을 느낀다. 요즘 사람들은 어쩌면 이제 자신들만의 렌즈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 모른다. 대통령을 봐도, 풍경을 봐도 모든 사람이 같은 곳을 같은 방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뭔가에 집중한다. 직장생활을 바라볼 때 누군가에게는 돈이 우선일 거고 누군가에게는 워라밸이 중요할 수도 있다. 각각의 특수한 상황에서 마주치는 특별한 숙제를 크게 느끼는 것이다.

최근 정치인들이 지하철을 타거나 라면을 먹는 이벤트를 하다 예상치 못한 디테일을 지적받아 곤욕을 치르는 걸 본다. 이제 국민들의 눈에 포착될 디테일을 챙기지 않으면 실패할 수도 있는 대중 정치인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고 있다. ‘고양이눈’의 장수 비결은 세상의 이런 변화를 보여줬기 때문일 것이다.

변영욱 사진부 차장 cut@donga.com


#흑인#미국#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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