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 다한 정발[임용한의 전쟁史]〈138〉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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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3일 영도에서 사냥 중이던 부산진 첨사 정발은 수평선 너머로 새까맣게 나타난 배들을 발견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일본의 침공함대 제1진이었다. 이것이 임진왜란의 시작이다.

즉시 성으로 돌아간 정발은 군병을 소집하고, 주민을 성 안으로 대피시켰다. 몇 척 되지 않았지만 적에게 노획되지 않도록 포구의 전함을 침몰시켰고, 성벽에 병사를 배치하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짧은 시간 동안 당황하지 않고 할 도리를 다한 것을 보면 그는 유능한 장군이었던 것 같다.

정발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선조 대에 비변사가 무관 중에서 유망주 명단을 뽑아 올릴 때 정발이 포함되어 있었다. 1589년 정발이 북방 국경지역에서 몰래 조선 영토로 잠입한 여진족 몇 명을 사살하는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부산진 첨사로 발령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부산은 중요한 곳이었다. 부산에는 조선 초기부터 왜관이 설치되어 있어서 일본인 거주민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포구의 규모도 그렇고 일본이 침공한다면 상륙 지점으로 가장 유력한 곳이었다. 그런 이유로 부산진 첨사에게는 특별한 용기와 사명감이 필요했다. 최일선의 기지는 적의 침공을 맞이하면 전멸을 각오하고 어떻게든 용감히 싸워서 후방에서 대비할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

정발과 부산진의 병사들은 그 의무를 다했다. 그 저항의 시간이 하루에 불과했지만, 일본군은 1만8600명이었고, 부산진성의 병력은 겨우 600명이었다. 이 병력으로는 성벽에 고르게 수비대를 배치하기도 힘들었다. 종전 후에 정발은 포장을 받았지만, 다른 장군에 비하면 포상이 늦었다. 그나마 후손이 상소를 하자 뒤늦게 정부에서 조사를 벌였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승전한 장병을 포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죽음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한 사람도 높여야 한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의 헌신에 큰 빚을 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임용한 역사학자
#정발#임진왜란#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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