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그들은 피폭자 고통보다 전력 손실을 걱정했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입력 2020-11-28 03:00수정 2020-11-29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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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생존 지침서/케이트 브라운 지음·우동현 옮김/628쪽·3만5000원·푸른역사
방사성 물질은 반감기(半減期)가 있다. 초기의 강력한 영향은 점차 지표와 대기에 흩어지고 옅어진다. 그러나 그 장기적인 영향도 위험하기는 다를 바 없다.

이 책의 구성도 그렇다. 앞 장은 1986년 8월 일어난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의 치명적인 폭발 현장으로 바로 진입한다. 이어 현장에 남아 삶을 이어간 사람들, 현장 부근의 자연과 생태, 사태를 축소하기 급급했던 소비에트의 관료들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추한 모습을 차례로 비추며 ‘저준위’ 충격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양모 공장이 있는 체르니고프(체르니히우)는 사건 발생지에서 멀었다. 사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에 없던 규모의 양털이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양털 가공 노동자들은 이상한 증상에 시달렸다. 원전 폭발 이후 오염 지역의 양들을 살(殺)처분하면서 양털을 이곳으로 보낸 것이다. 소련 당국은 죽인 동물의 털과 가죽은 물론이고 고기까지 갈아 오염되지 않은 고기와 섞은 뒤 소시지를 만들었다. 소련 정치국은 그들의 명예와 전력 손실을 우선 걱정했다. 피폭된 사람들에 대한 고려는 그 뒤였다. 모스크바가 파견한 기상 전문가 유리 이즈라엘은 오염된 땅으로 사람들이 빨리 돌아오도록 독려했다. 그는 이후 러시아 푸틴 정부에서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일을 맡고 있다. 피해는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북쪽의 벨라루스(당시 벨로루시)에서 심각했다. 체르노빌은 두 나라의 접경지역에 가까웠지만 벨라루스는 사건 수습의 결정 과정에서 제외됐고 모든 조치가 늦어버렸다.

지난해 제작된 미영 합작 드라마 ‘체르노빌’이 지구 곳곳에서 시청자를 끌어모았다. 드라마의 주역인 발레리 레가소프는 이 책에 딱 한 번 등장한다. 소련이 위험한 RBMK 원자로를 계속 지어댄 이유가 ‘플루토늄 확보’인 점을 정치국 회의에서 언급하는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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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학자인 저자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러시아를 거듭 찾아 방대한 자료를 추적했다. 기밀 문건 파기를 막기 위해 분투한 선배 추적자들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는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체르노빌 생존 지침서#케이트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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