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의 대화’에 빠진 與… 혼자만의 ‘레거시’ 만들기[광화문에서/길진균]

길진균 정치부 차장 입력 2020-11-27 03:00수정 2020-11-27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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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진균 정치부 차장
집권세력의 ‘역사와의 대화’가 부쩍 잦아지고 있다. ‘소명’ ‘맹세’ ‘레거시’ ‘백년대계’ 등의 화두가 최근 여권 인사들 사이에서 더 자주 들린다. 검찰개혁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출범은 ‘시대적 소명’이고, 가덕도 신공항은 ‘국가백년대계’, 종전선언 추진은 ‘역사’와 마주한 대통령의 결단이라는 식이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19일 페이스북을 통해 “몸과 마음은 지치지만 검찰개혁은 내 소명”이라고 밝혔다. 또 “해방 이후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하고 좌절했던 검찰개혁을 반드시 이뤄야 한다는 국민 염원을 외면할 수 없기에 제 소명으로 알고 받아들였던 것”이라고 썼다. 당장은 힘들고 어렵지만 먼 훗날 역사의 평가만 보고 가겠다는 취지다. 남들이 뭐라 하든 추 장관은 그렇게 생각한다. 16일 국회 법사위에서 “검찰개혁을 하기 전까지는 정치적 욕망, 야망을 갖지 않기로 맹세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 바이든의 미 대선 승리로 빨간불이 켜졌지만, 종전선언 역시 ‘70년 남북 간 적대행위를 끝내는 역사적 결단’이 현 정권의 모범 수식어다. 적어도 종전선언은 ‘역사’와 떼어내기 어려운 이슈라는 점에서 공감 가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여권은 이를 뛰어넘어 임기 말 주요 쟁점 사업에 대해 앞다퉈 ‘역사’를 끌어다 붙이고 있다.

여권 인사들이 주문 외우듯 반복하는 ‘시대적 소명이자 과업’인 공수처는 말할 것도 없고, 어느덧 ‘국가백년대계’로 격상된 가덕도 신공항 사업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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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총리실 산하 검증위원회가 김해신공항 사업의 사실상 백지화 발표를 한 직후 반대론자들을 향해 “국가백년대계인 가덕도 신공항 건설의 참뜻이 왜곡되지 않도록 부디 신중하게 처신해 주시기 바란다”고 주문했다. 여권은 또 “가덕도 신공항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업(遺業)”이라고 외친 더불어민주당 박재호 의원처럼 대놓고 이를 노무현·문재인 정부의 레거시로 연결하고 있다. 친문 핵심들이 가덕도 신공항을 ‘국가백년대계’이자 ‘레거시’로 규정한 이상, 신공항의 경제적 타당성을 차분히 따져보자는 지적이나, 선거를 의식한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은 반문(반문재인) 진영의 불순한 정략적 주장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에 여권 인사들은 “정부 5년 차에 접어드는 데다 내년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확실한 레거시가 필요한 상황”이라며 정치적 계산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는다.

문제는 ‘역사와의 대화’가 내포하고 있는 독선의 위험성이다. 집권세력이 임기 말 레거시 만들기에 몰두하면서 ‘역사와 직접 대화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대화, 설득, 타협 등 소통과 정치의 기능은 그 의미가 사라진다. 정권 내부에서도 직언은 없어지고, 핵심들은 정권 바깥의 목소리에도 귀를 닫는다. 오로지 멋 훗날의 역사와 나 홀로 대화하며 달성해야 할 목표만 되새기게 된다. ‘독선의 늪’에 빠져든 정권과 국민 사이의 벽은 더욱 높아진다. “정권이 가장 위험한 때는 임기 말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역사와의 대화’를 시작할 때”라는 여의도 속설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역사와 대화’하기 시작한 정권은 일방적이고, 사회적 갈등과 대립의 원인으로 작용하기 십상이다.

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역사와의대화#종전선언#집권세력#공수처#가덕도신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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