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상훈]‘환율 1400원’ 숫자보다 중요한 경제 정책

  • 동아일보

이상훈 경제부장
이상훈 경제부장
“당국자들 어깨가 무겁겠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관련 책임 당국에 의하면 한두 달 정도 지나면 1400원 전후로 떨어질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고 말한 다음 날, 대형 금융사의 한 최고경영진은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이 보고받고 국민에게 공개한 ‘책임 당국의 예측’은 이제 당국이 한두 달 안에 결과로 증명해야 할 단기 과제가 됐다.

외환시장 안팎에서는 환율이 안정될 것이라는 반가움보다 조심스러워하는 기류가 먼저 감지된다. 대통령이 시한과 목표치를 구체적인 숫자로 제시하면서, 시장 참가자들에게 본의 아니게 정책 당국의 ‘패’를 노출했기 때문이다. 당국이 마지노선을 지키겠다고 나섰다가 글로벌 자산 시장에서 투기 세력에게 공격의 이정표를 제공했던 사례는 한국은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적지 않다. 환율을 안정시키겠다고 다진 강한 결의가 누군가에게는 수익을 노릴 기회가 된다.

최근 환율 하락은 ‘빌려온 평화’

환율은 한 국가의 경제 실력을 나타내는 지표다. 지난해 10월 이후 사실상 ‘뉴노멀’이 된 1400원대 원-달러 환율은 한국 경제 펀더멘털(기초 체력)에 대한 냉정한 시장 평가가 반영돼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추산하는 한국 잠재성장률은 1%대로 내려앉았다. 인구 감소, 노동 생산성 하락, 산업 경쟁력 약화 등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니 20여 년 전 5%대였던 잠재성장률이 1%대로 주저앉은 것은 이상하지 않다.

최근 미일 당국 공조 등으로 엔화 환율이 떨어져 원화 환율도 일부 하락하고 있지만, 이는 우리 실력과 무관한 ‘빌려온 평화’다. 대외 여건에 따른 일시적 하락을 정책 성과로 오판했다가 금리나 외환 정책 방향을 잘못 택하는 패착에 빠질 수 있다. 펀더멘털 개선 없는 환율 하락은 외환 유출 수요를 자극해 경제 기초 체력과 대외 지급 능력을 약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대외적 여건에 기댄 일시적 하락을 정책 성과나 한국 경제 실력으로 착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정부와 통화 당국은 해외 주식에 투자하는 서학개미 탓, 달러를 보유하면서 풀지 않는 기업 탓을 한다. 이들은 과연 환투기 세력일까. 아니다. 오히려 한국 경제의 현실을 누구보다 냉정하게 읽는 ‘달러 실수요자’에 가깝다. 반도체와 자동차 등 일부 대형주 중심으로 한국 주식시장의 K자형 양극화 속에서, 투자자들이 해외 증시로 눈을 돌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기업들도 각종 규제와 정책 불확실성을 피해 해외로 나가고 있다.

환율 개입이라는 대증요법으로 원화 가치를 억누르려 해도, 자본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거대한 흐름을 차단하지 못한다면 정책 지속 가능성은 작을 수밖에 없다. 허약한 경제 체력을 그대로 두고 특정 환율 수준을 인위적으로 방어하려다 자칫 아까운 외화만 단기 방어용 탄약으로 소진할 수 있다.

코스피가 5,000을 돌파했다고 자축하지만 반도체 자동차 대형주 위주로 오르는 증시 온기는 경제 전반과 여전히 괴리돼 있다. 증시에서 불어난 자금이 기업 설비 투자나 가계 소비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나타나길 기대하지만, 현실은 서울 강남 3구의 자본재화된 부동산과 서학개미의 해외 투자에 쏠리고 있다.

명확한 환율 목표, 되레 불안 키울 수도

‘한두 달 뒤 환율 1400원’이라는 명확한 목표가 단기적으로 시장을 잠재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정책의 한계를 드러내며 불안을 키울 우려가 크다. 정상화는 선언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정책 당국은 숫자를 맞추려 수단을 동원하기보다, 자본이 떠나는 근본 원인인 규제를 개혁하고 잠재성장률을 높이는 데 집중해야 한다. 시장은 결국 실질적인 경제 체력 회복에 반응한다. 숫자가 실력을 앞서갔을 때, 경제는 항상 예측 불가능한 위험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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