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어머니[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168〉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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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병실 커튼을 젖혀 달라고 하더니 창밖에 서 있는 나무의 노란 잎들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아름답구나.” 딸은 어렸을 때 이후로 어머니가 그런 미소를 짓는 걸 본 기억이 없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젊은 엄마였을 때 짓던 미소였다. 일흔여덟 살의 어머니는 암에 걸려 죽어가면서 오래전에 잃어버린 미소를 되찾았다.

일종의 페미니즘 교과서인 ‘제2의 성’을 쓴 실존주의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가 그 어머니의 딸이었다. 딸은 어렸을 때는 어머니를 좋아했지만 10대에 접어들면서 급격하게 사이가 나빠졌다. 둘 사이의 불화와 갈등은 영원할 것 같았다. 어머니는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였다. 신앙을 버리고 철학자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으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딸이 너무 못마땅했다. 딸은 딸대로 모든 것을 통제해야 직성이 풀리는 어머니의 독선과 편견, 편협함이 싫었다. 그런데 병든 어머니를 간호하는 과정에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죽어가는 어머니는 거추장스러운 감정들로부터 벗어나 순수해졌다. 나뭇잎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것은 그래서였다. 죽음이라는 엄청난 현실 앞에서 독선과 편견, 허세와 원망은 설 자리를 잃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보부아르는 ‘편안한 죽음’이라는 책에서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보낸 마지막 6주를 회고하며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마지막까지 죽기 싫다고 몸부림을 치던 어머니가 결국 죽음의 폭력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어머니와 화해하고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죽음이 충분히 예상된 것이었음에도 텅 빈 병실이 확인해주는 어머니의 부재는 엄청난 상처로 다가왔다. 그 상처는 참을 수 없는 그리움과 회한의 감정과 섞였다. 자신만 살아 있다는 게 죄스러웠다. 보부아르처럼 냉철하고 논리적인 철학자도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는 정말이지 속수무책이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철학자#어머니#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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