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어른을 위한 음악[김학선의 음악이 있는 순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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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미조-바람 같은 날을 살다가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
37년. 이만큼 직관적인 제목이 또 있을까. 1979년, 인기 가수의 자리에서 미술 공부를 위해 훌쩍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던 정미조.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는 가수가 아니라 미술가의 삶을 살았다. 더 이상 가수 정미조는 없는 것만 같았다. 2016년, 그런 그가 37년 만에 녹음실에 들어가 노래를 불렀다. 앨범 제목은 그대로 ‘37년’이 됐다.

‘37년’의 첫 곡 ‘개여울’에서 정미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 나도 모르게 작은 탄식이 나오던 걸 기억한다. 감탄의 탄식이었다. 첫마디에 37년의 세월이 담겨 있었다. 지금껏 ‘개여울’은 많은 가수의 목소리로 불렸지만 ‘개여울’은 오직 정미조만의 것이라는 선언 같았다. 2016년 발표한 ‘37년’을 통해 다시 가수의 길로 돌아온 정미조는 계속해서 앨범을 발표하고 공연을 하였다.

‘37년’을 제작한 이주엽 JNH뮤직 대표는 얼마 전 한 일간지에 ‘성인가요의 미학적 파산’이란 칼럼을 썼다. 기자 출신으로 수많은 앨범을 제작하며 그 앨범들의 가사를 도맡아 쓰고 ‘이 한 줄의 가사’란 책을 내기도 한 이 대표는 한국 성인가요는 미학적으로 파산했다고 말한다. “가사는 너무 뻔하고 퇴행적”이고, “편곡은 열 곡이 한 곡인 듯 기계적 패턴을 반복”해왔다는 게 근거였다. 칼럼을 두고 음악 관계자들 사이에서 작은 논쟁이 일었다. 난 이 대표의 편에 섰고 그의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에서 많이 쓰는 ‘어덜트 컨템퍼러리 뮤직’을 풀이하자면 ‘성인 취향의 음악’ 정도가 될 것이다. 한국에서 이런 성인 취향의 음악 시장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성인가요는 곧 트로트로 통한다. 트로트에 거부감을 가지고 트로트와는 결이 다른 어른의 음악을 듣고자 하는 이에게 한국 음악 시장은 결코 친절하지 않다.

정미조의 음악은 ‘성인’가요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얼마 전 발표한 그의 신작 ‘바람 같은 날을 살다가’는 ‘성인 취향’의 가요, 즉 한국 어덜트 컨템퍼러리 음악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꼽을 만하다. 정미조의 연륜이 묻어 있는 목소리, 어른의 이야기가 담긴 이주엽의 노랫말, 프로듀서 손성제와 재즈 음악가들이 중심이 된 연주는 자연스레 기품이나 품격 같은 낱말을 음악과 연결짓게 만든다.

성인가요라고 해서 모두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이고 퇴행적인 가사를 적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의 성인이 모두 정형화된 패턴에 맞춰 춤출 수 있는 음악을 원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모든 노래를 꺾어 부르는 창법을 선호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이 모두에 속하지 않는 정미조의 새 성인가요 ‘석별’을 반복해 듣는다. “오늘은 우리 헤어지기 좋은 날”이나 “오늘 우리 헤어져도 괜찮을 것 같네” 같은 담담한 이별의 이야기 속엔 수없이 많은 어른의 사정이 들어 있을 것이다. 이런 사정에 공감할 수 있는 어른을 위한 음악이 귀하게 여기에 있다.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


#정미조#37년#개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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