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만에 글 깨친 내가 자랑스럽다”… 할머니들 특별한 한글날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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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학생들의 ‘한글 사랑’
코로나로 대면 강의 기회 줄자…카톡 사용법 배워 온라인 수업
배달되는 학습지 풀면서 열공…“이제 은행 가서 혼자 돈도 뽑아”

한글 사랑에 빠진 늦깎이 학생들의 열정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도 꺾지 못했다. 온라인수업 등을 통해 학습을 이어가면서 코로나19를 주제로 쓴 시화. 서울문해교육센터 제공
한글 사랑에 빠진 늦깎이 학생들의 열정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도 꺾지 못했다. 온라인수업 등을 통해 학습을 이어가면서 코로나19를 주제로 쓴 시화. 서울문해교육센터 제공
“바람에 날려볼까/용광로에 태워볼까/코로나19 요놈아… 멀리멀리 가다오/우리 할매들 공부 좀 하게… 매섭고 추운 겨울이 지나면/봄은 온다/우리 힘을 모아 기다리련다/온 국민 모두가 방긋방긋 웃음꽃 피는 그날까지”(자작시 ‘희망의 봄은 온다’에서)

8일 오전 서울 관악구에 있는 관악평생학습관.

옛날 교복을 차려입은 60대부터 70대까지 어르신 14명이 사춘기 소녀들처럼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배움의 기회를 놓쳤던 이들. 한글을 배우는 ‘관악세종글방’ 학생들이 졸업앨범 사진을 찍으러 모였다. 난생처음 입어본 교복을 매만지며.

충남 논산시의 한 마을 정자에서는 평균 나이 80세가 넘는 어르신들이 한글 교사가 불러주는 낱말을 받아쓰고 있다. 논산시는 지난달 21일부터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배달 학습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논산=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충남 논산시의 한 마을 정자에서는 평균 나이 80세가 넘는 어르신들이 한글 교사가 불러주는 낱말을 받아쓰고 있다. 논산시는 지난달 21일부터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배달 학습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논산=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이들에게 올해 한글 공부는 특히나 뜻깊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학습관이 2월부터 문을 닫았던 탓이다. 한글을 배울 길이 막혔지만 할머니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교사 심인복 씨의 주도로 모바일 메신저를 이용해 채팅과 영상 중계를 함께하는 원격수업을 이어갔다.

물론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에게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바일 메신저 사용 방법 자체를 모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금남 씨(73)는 “휴대전화 대리점으로 달려가 가게 총각한테 옥수수 몇 개 주고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해 배웠다”고 했다. 이동희 씨(72)는 “학교 문턱을 밟아보지 못해 평생을 풀이 죽은 채 살았는데 이제는 은행에서 혼자 돈을 뽑을 줄 아는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까똑 까똑 까똑/수업하라고 부르는 소리/코로나19에 집에서 공부한다… 젤 먼저 돋보기를 챙기고 콩닥/연필을 들고 콩닥/학습지를 펼쳐놓고 콩닥… 까똑 까똑 까똑/내 맘 한아름 바람에 실어/행복하고 신나게/저만큼 앞서 달린다’ (자작시 ‘콩닥콩닥 설레는 내 마음’에서)

관악세종글방만큼 첨단은 아니었지만 ‘레트로’한 방식으로 한글 공부를 이어간 어르신들도 있었다. 충남 논산시가 운영한 한글대학도 2월부터 문을 닫으며 배움의 길이 가로막혔다. 이들이 생각해낸 건 ‘배달 학습지’다. 대부분 2G폰을 쓰는 어르신을 위해 지난달부터 학교에서 매주 집으로 찾아가 대문에 학습지를 걸어뒀다.

7일 논산의 엄영숙 씨(77) 집. 주황색 문고리에는 이름이 큼지막하게 적힌 가방이 걸려 있었다. 엄 씨는 “학습지가 배달되는 화요일만 되면 새벽부터 눈이 저절로 떠진다”며 아이처럼 웃었다. 7개월 동안 멈췄던 수업. 어르신들은 배움에 너무나 목말랐다. 교사 신은주 씨는 “동네 어르신들은 제가 나타나면 멀리서 보행기를 밀면서 마을 한 바퀴를 따라다닌다”고 전했다.

한글 공부는 코로나19로 인한 우울을 이겨내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40여 년 전 남편을 잃고 홀로 지내는 유영국 씨(82)는 “한글 공부는 내 유일한 말동무다. 한 글자 한 글자 쓰다 보면 하루가 다 간다”며 기뻐했다. 17장만 풀면 되는 받아쓰기 숙제도 단숨에 77장씩 풀어버렸다고 한다.

코로나19에도 ‘늦깎이 학생’들의 한글 사랑은 꺾이지 않았다. 이들은 오늘도 돋보기안경을 코에 걸고 정성스레 깎은 연필을 든다.

김소영 ksy@donga.com / 논산=이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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