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부를 때까지… 94세 의사는 진료를 멈추지 않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6일 03시 00분


코멘트

한원주 매그너스요양병원 과장 별세
병원 운영하다 무료 진료 눈돌려
“죽을 때까지 의사로 일하고 싶다”
요양병원서 치매환자들 돌봐… 입원 직전까지 하루 10명 진료

한원주 매그너스재활요양병원 내과과장(왼쪽)이 생전인
2017년 병원 마당에서 한 환자와 손을 맞잡고 산책하고
있다. 고인은 숨을 거두기 한 달 전까지도 항상 오전
9시 정각에 병원에 출근해 환자들을 돌봤다. 동아일보DB
한원주 매그너스재활요양병원 내과과장(왼쪽)이 생전인 2017년 병원 마당에서 한 환자와 손을 맞잡고 산책하고 있다. 고인은 숨을 거두기 한 달 전까지도 항상 오전 9시 정각에 병원에 출근해 환자들을 돌봤다. 동아일보DB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5일 경기 남양주에 있는 매그너스재활요양병원.

한 70대 환자가 ‘고향의 봄’을 부르기 시작하자 갑자기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아이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손뼉까지 치는데 몇몇 직원들은 뒤돌아서 손끝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이 동요는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환자에게 한원주 ‘원장’이 가르쳐준 노래였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기억에 동구 밖 지천에 피어나던 꽃들로 남은 이. 한원주 매그너스재활요양병원 내과과장이 지난달 30일 우리 곁을 떠나갔다. 향년 94세로 국내 최고령 현역 의사였던 그는 삶을 마감하는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환자들을 돌봤다.

어쩌면 그의 헌신적인 삶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일지도 모른다. 한 원장은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인 한규상 선생과 역시 독립운동가인 박덕실 선생의 슬하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발자취를 따라 언제나 베푸는 삶에 관심이 컸다. 경성의학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개업의로 일하며 언제나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에 봉사했다. 특히 1978년 과학자였던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뒤엔 개인병원을 정리하고 줄곧 무료 진료를 해왔다.

노년의 여생을 지키는 요양병원에 관심을 가진 것은 2008년. 당시 의료선교의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그에게 손의섭 매그너스의료재단 이사장이 연락을 취해왔다. 한 원장은 자신의 저서 ‘백세 현역이 어찌 꿈이랴’에서 “어르신들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끝까지 기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게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됐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요양병원 관계자는 “당시 ‘한 원장님’은 죽을 때까지 의사 하고 싶다는 한 가지 조건만 내걸었다”고 전했다.

정식 직함은 내과과장인 그를 주변 모두가 원장이라 부르는 이유는 뭘까. 실은 한 원장은 몇 년 전 병원 측에서 ‘명예 원장’ 직함을 제안했지만 끝내 마다했다. 한사코 “그런 거 관심 없다”며 손사래를 쳤단다. 하지만 의료진과 환자들은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레, 90대 고령에도 자상하게 솔선수범하는 그를 “원장님”이라 불렀다.

한 원장은 항상 환자들과의 대화와 스킨십을 중시했다. 자주 거동이 가능한 환자들을 로비에 모아놓고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도록 권했다고 한다. ‘고향의 봄’도 그때 가르쳐준 노래였다. “평균 나이 70이 넘은 치매환자들이 대다수인 요양병원에서 대화는 가장 중요한 치료법”이라고 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한 환자는 한 원장이 정성으로 깊은 관심을 기울인 끝에 오랫동안 앓아왔던 당뇨를 치유하는 ‘작은 기적’도 벌어졌다.

세상을 보듬었던 한 원장의 삶은 의료계에서도 빛이었다. 2017년 헌신적인 공로를 인정받아 ‘제5회 성천상’을 수상했다. 성천상은 의료봉사활동으로 사회에 감동을 주는 참의료인에게 수여된다. 당시에도 그는 상금 1억 원을 모두 기부했다.

지난달 8일 숙환으로 쓰러져 10일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한 한 원장은 전날까지도 변함없이 환자를 돌봤다. 실제로 기록 차트엔 7일 10명의 환자를 진료한 기록이 남아 있다. 아직도 여러 환자들은 그의 영면을 모른 채 “원장님, 어디 가셨느냐. 보고 싶다”고 찾는다고 한다.

삶의 끝자락이 다가왔음을 느낀 한 원장은 지난달 23일 다시 요양병원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생의 마지막 병원’으로 선택한 곳에서 눈감길 원해서였다. 운명의 시간, 그의 침상을 지키는 가족과 동료들에게 딱 세 마디를 남겼다. “힘내라.” “가을이다.” “사랑해.”

한 원장이 떠난 병원엔 여전히 그의 향기가 진하게 남아 있다. 병원 마당엔 보리수나무 한 그루가 자리를 지키고 섰다. 정성으로 돌봐 완치된 그 당뇨 환자가 한 원장을 위해 심었다. 완연한 가을볕을 머금은 나뭇가지엔 이런 팻말이 붙어 있다.

“한원주 원장님, 감사합니다.”

김태언 beborn@donga.com·이소연 기자
#한원주 원장 별세#최고령 의사#의료봉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