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과 열정만 있다면 무엇이든 배울 수 있는 세상[광화문에서/김희균]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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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10여 년 전 ‘꽃보다 남자’라는 TV 드라마가 인기였다. 주인공 중 한 명인 재벌가 남자는 요트를 타며 “하얀 천이랑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라고 외쳤다.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반응과 함께 지금까지도 수많은 ‘짤’과 패러디를 낳는 역대급 대사다. 오죽하면 그 드라마를 한 번도 안 본 나조차 머릿속에 그 대사가 자동 재생될 정도다.

추석 연휴 이 대사가 떠오르는 순간이 많았다. 장기간 ‘집콕’을 해보니 평소 못 한 이런저런 일들을 하게 됐다. 아이와 500조각짜리 퍼즐도 맞추고, ‘냉파(냉장고 파먹기) 요리 배틀’도 했다. 달걀로 프라이를 하느냐 스크램블을 하느냐, 식빵을 토스터에 넣느냐 프라이팬에 굽느냐를 겨루는 수준이었지만 ‘냉장고랑 프라이팬만 있으면 뭐든 먹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

집콕 중 가장 심취한 일은 미국 NBC TV 프로그램인 ‘더 투나이트 쇼 스타링 지미 팰런’이 9월 29일부터 닷새간 특별 편성한 ‘BTS 위크’ 관련 영상을 찾아보는 일이었다. 방탄소년단(BTS)은 5번의 무대 중 2번을 경복궁 근정전과 경회루에서 펼쳤다. 서울에 살면서도 고궁 나들이가 힘든 요즘, 아름다운 문화재와 각국 사람들이 이에 경탄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답답함과 허전함을 달랠 수 있었다. 흰 천과 바람 대신 스마트폰과 와이파이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세상인 셈이다.

방탄소년단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면 리더 RM은 영어가 유창하다. TPO(시간, 장소, 상황)에 맞는 어휘와 억양을 유려하게 구사한다. 유엔 연설에서 “나는 (경기) 일산 출신”이라고 소개한 것처럼 ‘토종 한국인’인 그가 영어를 배운 경로는 미국 시트콤 ‘프렌즈’. 한글 자막, 영어 자막, 무자막 순으로 보고 따라 하면서 독학했다고 한다.

RM이 미국 콘텐츠로 영어를 배운 지 10여 년 만에 이제는 세계인이 방탄소년단의 콘텐츠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방탄소년단의 영상을 활용해 만든 한국어 교재 ‘런 코리안 위드 BTS’는 8월 패키지 출시 직후 미국, 일본 등지에서 금방 매진됐다. 미국, 프랑스, 이집트, 베트남의 몇몇 대학은 가을학기에 이 교재로 한국어 정규 강좌를 개설했다.

방탄소년단이 아니더라도 이미 많은 외국인들이 드라마, 영화, 뮤직비디오 등 다양한 K콘텐츠를 통해 한국을 익히고 있다. 정민 한양대 교수의 저서 ‘미쳐야 미친다’에 나오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옛 사례들이 오늘날은 시공간을 초월해 번지고 있다. 어떤 대상에 미치도록(狂) 빠져 전문가 수준에 미치는(及) 이들이 많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2020년의 오프라인 세상은 제약투성이가 됐다. 하지만 온라인에서는 갈 수 있는 곳, 할 수 있는 것, 배울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하다. 관심과 열정만 있다면 어느 분야든 ‘미치는 데’ 도움 되는 정보가 넘쳐난다.

연휴가 지나니 어느새 10월이다. 연말로 향해 가면서 국내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전 세계가 합의해 2020년을 삭제하고 내년을 다시 2020년으로 정하자’는 말이 많이 나온다. 그만큼 2020년은 힘든 해지만,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에 눈을 뜨게 한 기념비적 해이기도 하다. 남은 석 달, 나만의 미치고 싶은 대상을 하나 정해 열정을 바친다면 2020년이 아픈 기억만 남기지는 않을 거다.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foryou@donga.com
#집콕#코로나19#오프라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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