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커맘’ 배럿이 페미니스트? 美대법관 지명자가 던진 화두[광화문에서/이정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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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워싱턴특파원
이정은 워싱턴특파원
지난 주말 트위터를 비롯한 미국의 소셜미디어에는 에이미 코니 배럿 연방대법관 지명자의 자녀 7명의 사진이 여러 차례 올라왔다. 엄마의 대법관 지명식이 열렸던 지난달 26일(현지 시간) 백악관 로즈가든 맨 앞에 한 줄로 앉아있는 사진이다. ‘마스크도 씌우지 않고 자녀들을 이런 행사장에 노출시킨 배럿 판사는 대법관 자격이 없다’는 비판 글들이 달렸다.

이 행사에 참석했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부부와 백악관 고위 참모들이 줄줄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난의 화살이 배럿 판사에게까지 향하는 분위기다. 그의 대법관 지명을 막으려는 진보 진영의 거센 반대까지 작용하면서 ‘배럿 때리기’는 이미 일주일이 지난 행사 사진까지 다시 들춰냈다.

하지만 기자의 눈에 자녀 7명의 사진은 다른 관점에서 보인다. ‘저 아이들을 모두 챙기면서 연방대법관 자리에 지명됐단 말이야?’ 하는 새삼스러운 생각에 사진을 뜯어보게 된다. 두 자녀를 키우면서 일하는 것도 기자가 직접 해보니 하루하루가 전쟁인데. 7명 중에는 아이티에서 입양한 두 명의 흑인 자녀도 있다.

배럿 판사의 남다른 삶은 미국에서도 꽤나 화젯거리인지 이와 관련된 각종 칼럼과 소셜미디어 글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관은 종신직이자 미국에 단 9명밖에 없는 사법부의 최고위직이다. 이런 자리에 오를 정도의 능력과 헌신을 요구받으면서 동시에 7명의 자녀를 돌보기에는 벅찬 게 아니냐는 질문들이 나온다. 심지어 그는 매일 오전 5시에 크로스핏을 하고, 아이들의 학교 봉사활동과 스포츠에 참여하는 ‘사커맘’이라고 언론은 소개하고 있다.

이런 논란들 자체가 여성에 대한 또 다른 편견이라는 지적도 있다. 자녀가 7명 있는 남성 판사라면 이런 논란 자체가 벌어지지도 않았다는 문제 제기다. 그의 슈퍼맘 ‘신화’가 모범답안인 것처럼 포장되어 여성들에게 ‘그것 봐, 너도 할 수 있어’라는 또 다른 압박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들었다. 일부 언론은 심지어 그가 새로운 페미니즘의 모델이라는 의미까지 부여하고 있다. 꼭 낙태를 옹호하고 자녀 양육으로부터 여성 해방을 주장해야만 페미니즘인가, 가정에서부터 성 평등을 실천하며 가정과 일의 균형을 맞춰 가는 것이 또 다른 여권 신장의 방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배럿 판사는 2019년 한 대담에서 ‘어떻게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춰갈 수 있느냐’는 질문에 “팀워크다. 요리를 하고 아이들을 병원에 데려가는 일을 남편과 나눠 맡는다”고 답했다. 그는 대법관 지명식에서도 연단에서 남편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표시하며 “남편은 21년간 매일 아침마다 ‘내가 뭘 해주면 좋겠느냐’고 물어보며 가정 일을 나눠 맡았다”고 했다.

그의 대법관 임명을 둘러싼 논란은 거세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까지 불과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지명을 강행하고,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인준 절차를 속전속결로 진행하려는 것을 놓고 진보 진영은 들끓고 있다. 배럿 지명자에 대한 인신공격 수위도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치 싸움과 진영 논리만 아니라면 배럿 지명자가 워킹맘들의 롤모델이 될 능력자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미래 여성의 권리 신장에는 어떻게 기여할지 궁금해진다.

이정은 워싱턴특파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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