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소수자 권익신장에 헌신… “후임은 새 대통령이 지명” 유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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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상징’ 긴즈버그 대법관의 삶… 낙태 옹호-여성 생도 입학허용 판결
性을 섹스 대신 젠더로 표현… 이름 약자 RBG 기념품 큰 인기
그의 일생 다룬 영화-다큐 제작도

긴즈버그 대법관이 별세한 다음 날인 19일(현지 시간) 워싱턴 시민들이 대법원 앞에서 그의 이름 머리글자를 딴 ‘우리는 당신이 
그립다 RBG’ 팻말,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 등을 들고 추모하고 있다. 그는 평생을 양성 평등과 소수자 권리 증진을 
위해 힘써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워싱턴=AP 뉴시스
긴즈버그 대법관이 별세한 다음 날인 19일(현지 시간) 워싱턴 시민들이 대법원 앞에서 그의 이름 머리글자를 딴 ‘우리는 당신이 그립다 RBG’ 팻말,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 등을 들고 추모하고 있다. 그는 평생을 양성 평등과 소수자 권리 증진을 위해 힘써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워싱턴=AP 뉴시스
‘어떻게 싸우는지 알려줘서 고마워요’ ‘작은 체구였지만 거침없이 맹렬했던 삶’….

19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연방대법원. 대형 성조기가 조기로 게양된 대법원 앞 도로는 전날 타계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을 기리는 수백 개의 메모와 편지, 꽃다발, 촛불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별세 소식에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 추모객들이 놓고 간 것이었다.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온 데이나 엑스커트 씨는 “평생 여성을 위해 싸워온 긴즈버그 대법관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여성과 소수자의 권익 신장에 헌신해온 미 사법부 ‘진보의 상징’ 긴즈버그 대법관이 별세하자 미 전역에서 애도하는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그는 진보의 영웅이자 수십 년간 여성 변호사들의 역할모델이었다”고 평가했다.

긴즈버그는 법률가로서 약자의 편에 섰지만 여성, 엄마로 살아온 그의 삶 자체가 투쟁의 연속이었다. 1933년 뉴욕에서 유대계 가정의 둘째 딸로 태어난 긴즈버그는 코넬대를 졸업한 뒤 하버드대 로스쿨을 다니다 컬럼비아대 로스쿨로 편입해 수석 졸업했다. 하버드대 로스쿨 재학 당시 동급생 540명 중 여성은 9명에 불과했다. 학과장이 “왜 남학생 자리를 차지하고 있느냐”고 묻자 당황한 긴즈버그가 “(로스쿨 1년 선배인) 남편의 직업을 잘 알고 싶어서”라며 얼버무렸다는 일화도 있다.

로스쿨을 나와서도 법원 서기 채용에서 줄줄이 떨어졌다. “나는 유대인, 여성, 엄마라는 이유로 삼진 아웃을 당했다”고 회고했던 시기다. 결국 대학 은사가 뉴욕법원 판사에게 “긴즈버그를 받지 않으면 학생을 보내지 않겠다”고 말해 겨우 서기로 들어갔다.

긴즈버그는 1954년 코넬대에 다닐 때 만난 남편 마틴과 결혼해 1남 1녀를 뒀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학교에서는 긴즈버그에게만 전화해 “학교에 와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긴즈버그는 “이 아이에게는 부모가 둘이 있다. 번갈아 가면서 전화해 달라”고 했고 학교가 이후로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긴즈버그는 평생의 지지자였다가 2000년 작고한 남편에 대해선 “내게도 두뇌가 있다는 것을 존중해준 사람”이라고 했다.

고인은 컬럼비아대 로스쿨 교수를 거쳐 1993년 수도 워싱턴의 항소법원 판사로 재직 중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에 임명됐다. 상원에서 96 대 3의 압도적인 지지로 의회 인준을 통과했다. 긴즈버그는 2006년 샌드라 데이 오코너 대법관이 퇴임하고 2009년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이 취임하기 전까지 9명의 대법관 중 홍일점이었던 시절을 “최악의 시간”이라고 회고했다. “여성 대법관이 몇 명이면 만족하겠느냐”는 질문엔 늘 “9명 전원”이라고 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여성의 결정권을 존중하는 낙태를 옹호했다. 1996년에는 157년간 남성 생도만 받았던 버지니아군사학교가 여성 생도를 받아들이도록 판결했다. “재능과 능력이 평균을 넘어서는 여성에게 기회를 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판시하기도 했다. 남녀 임금차별 문제를 소급해서 소송할 수 없다는 판결에 대해서는 소수의견을 통해 강한 반대의견을 내며 의회에 법안 수정을 촉구했다. 결국 의회는 소송의 시점 제한을 완화한 ‘릴리 레드베터 법’이라고 불리는 공정임금법을 통과시켰다. 성(性)을 생물학적 의미가 강한 ‘섹스(sex)’ 대신 사회적 가치를 담은 ‘젠더(gender)’라고 표현한 것도 그였다.

미국인들은 긴즈버그의 이런 집요한 노력에 그를 ‘악명 높은(notorious) RBG’로 부르며 환호했다. 미국의 인기 래퍼인 ‘악명 높은 BIG’에서 따온 애칭이었다. 머그잔과 티셔츠, 지갑 및 각종 기념품에 그의 이름 약자인 RBG와 얼굴 사진이 사용되는 ‘문화 아이콘’이기도 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라는 제목으로 그의 일생을 다룬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제작됐고 2015년 타임지는 그를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올렸다.

그는 1999년 대장암이 발병한 이후 췌장, 폐 등으로 전이되며 모두 다섯 차례나 암과 싸웠다. 긴즈버그는 90세 때까지 연방대법관으로 일한 존 폴 스티븐스처럼 오래 일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워싱턴=이정은 특파원 lightee@donga.com /신아형·이윤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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