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안 리그 전락한 공공 소프트웨어 시장[광화문에서/김재영]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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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영 산업1부 차장
김재영 산업1부 차장
허리를 비틀고 골반을 쭉 빼며 조금이라도 작아 보이려 안간힘을 쓴다. 키가 줄었다는 측정 결과에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한다. 2018년 한국프로농구(KBL)에서 외국인 선수의 키가 2m를 넘으면 뛸 수 없다는 신장 제한 규정을 만들자 벌어진 진풍경이었다. 해외 언론은 ‘한국에선 키가 크면 농구를 할 수 없다’며 비꼬았다. 국내 선수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웠던 ‘신장 2m 제한’ 규정은 논란 끝에 결국 1년 만에 폐지됐다.

코미디 같은 일이 지금도 공공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키가 크면, 즉 대기업이면 일단 안 된다. 3000억 원짜리 차세대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나이스) 구축 사업을 추진하는 교육부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심의위원회에 대기업 참여를 허용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지난달 반려됐다. 벌써 네 번째다. 세 번이나 거부당하고도 도전하는 끈기도 놀랍고, 그걸 다시 퇴짜 놓는 고집도 남다르다.

교육부는 절박했다. 함부로 맡길 사업이 아니었다. 나이스는 성적 처리와 출결, 학사 일정 등을 관리하는 핵심 교육시스템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온라인 수업 등이 도입되면서 클라우드, 빅데이터, 인공지능(AI) 등 신기술 도입 필요성도 커졌다. 5월 초유의 온라인 개학 때 시스템 과부하로 접속 오류가 발생했던 트라우마도 있다. 당시 대기업 계열 정보기술(IT) 서비스 업체의 ‘무료 봉사’로 겨우 문제를 해결했다.

대기업 입찰이 제한된 건 2013년 소프트웨어산업진흥법이 개정되면서부터다. 국가안보, 신기술 등 예외적 상황을 제외하곤 공공 IT 사업에 대기업은 참여할 수 없다. 공공 시장에서 대기업의 독점을 막고 중소·중견기업을 키우겠다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7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판 오라클’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대기업, 중소기업, 발주처 모두 패배하는 게임으로 가고 있다. 대기업이 떠난 자리는 몇몇 중견기업이 독점했다. 이들은 더 성장해 대기업이 되면 공공 시장에서 퇴출되기에 더 노력할 유인이 없다. 시스템 개발 사업 발주는 사라지고 유지관리 사업만 늘었다. 발주처들이 중소기업에 일을 맡기기보단 최대한 고쳐 쓰고 있는 것이다.

전자정부·대중교통 시스템 등을 수출했던 대기업들은 이제 글로벌 시장에서 판판이 깨진다. 국내 공공기관에 들어갔다는 실적과 노하우가 없으니 명함을 못 내미는 것이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전자정부 수출 실적은 2015년 약 6000억 원에서 2018년엔 3000억 원으로 반 토막 났다.

정부가 ‘디지털 뉴딜’이라는 큰 장을 열었지만 이대로라면 공공 인프라 사업을 통한 경쟁력 확보와 일자리 창출도 요원하다. 기술과 인력, 노하우를 최대한 쏟아부어도 가능할까 말까인데 중소·중견기업만으로 가능할지 의문이다.

IT 업계에서는 대기업 참여를 무조건 막기보다는 중소·중견기업을 배려하면서도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상생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기업과 중소·중견기업이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것도 방법이다. 국내에서 경험을 축적한 대기업과 중소·중견기업이 손잡고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해 정면승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출전 제한이라는 손쉬운 편법으론 결코 리그의 경쟁력을 높일 수 없다.

김재영 산업1부 차장 redfoot@donga.com
#우물#리그#소프트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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