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D/ Opinion]‘한국고산지 발기부전연구회’를 아시나요?

  • 동아닷컴
  • 입력 2016년 12월 9일 14시 32분


코멘트

김용섭의 TREND INSIGHT

12월 3일 오후 제6차 촛불시위 참가자들이 깃발을 들고 청와대 100m 앞까지 진출했다.
12월 3일 오후 제6차 촛불시위 참가자들이 깃발을 들고 청와대 100m 앞까지 진출했다.
12월 3일, ‘하야하그라’를 크게 써 붙인 한국 고산지 발기부전 연구회의 깃발을 비롯해, 얼룩말 연구회, 범야옹연대, 청와대학교 학생회, 전국 한시적 무성욕자 연합, 전국설명충연합회, 장수풍뎅이 연구회 등 별의별 단체 깃발이 광화문 광장에서 휘날렸다. 이중에 장수풍뎅이 연구회는 실존하는 단체이긴 한데 집회 현장에 나온 깃발의 주인공들은 이들과는 무관하다. 친구들끼리 혹은 직장동료들끼리, 아니면 각종 모임 단위로 집회에 참석하는 이가많은데, 장수풍뎅이 연구회 깃발도 이런 모임 중 하나에서 재미 삼아 만든 것이다.

이들을 계기로 더 많은 깃발이 쏟아졌는데 보고 있자면 꼭 누가 더 재미있고 재치 있는 메시지와 단체명을 만들어내는지 경쟁이라고 하는 것 같다. 록페스티벌에 가도 재미있는 깃발을 만들어 온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촛불집회가 축제의 장이 됐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인터넷에서 깃발 제작을 잘하는 방법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바다낚시용 뜰채를 사서 뜰채를 떼어내면 깃대로 쓸 수 있는데 접이식 깃대를 펴면 4m에 육박한다. 가격은 3만 원 정도다. 여기에 현수막 프린팅 업체에 가로 1.8m, 세로 1.2m 사이즈의 깃발 제작을 의뢰하면 2만~3만 원이 든다. 즉 5만~6만 원이면 자기만의 깃발을 높이 휘날리며 집회에 참가할 수 있는 것이다.

촛불집회가 거듭될수록 모이는 인원이 계속 늘어 6차 촛불집회에선 전국적으로 232만 명, 서울에서만 170만 명 이상이 모였다. 흥미로운 건 촛불집회가 거듭될수록 깃발도 늘어난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집회 때 들고 나가는 깃발에 주로 정치적 구호가 적혀 있거나 단체, 조직명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과거와 달리 이번 깃발은 재치 있고 재미있는 것들이 넘쳐난다. 실체가 없는 단체여도 상관없다. 재미로 만든 단체 깃발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면서 집회의 분위기를 살리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연말 동창회나 송년회 모임을 토요일 광화문에서 한다는 이도 많다. 축제 같은 역사적 현장에 모여 집회도 참가하고, 집회 후 뒤풀이 삼아 송년 모임을 하겠다는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재치와 해학을 잃지 않은 한국인들이 만드는 평화집회는 세계적으로도 유래 없는 수준이다. 외신에선 이런 우리를 극찬한다. 심지어 광화문 촛불집회를 구경하러 한국을 찾는 외국인도 생길 정도다.

네이버에서 ‘패러디’를 검색해보면, 연관 검색어로 박근혜 길라임 패러디, 개콘 최순실 패러디,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 됐나 패러디 등이 먼저 나온다. 패러디는 오리지널 작품을 모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가진 문제의식까지 드러내는 창작 장르다. 이제 패러디는 문화예술 분야를 넘어 가장 중요한 의사표현 도구가 됐다. 풍자하고 비꼬면서 강렬한 메시지를 그 속에 담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패러디가 정치 패러디가 됐다는 사실은 정치인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정치에 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 정치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풍자와 해학으로 정치계를 지탄하는 게 나쁘지는 않다. 대통령과 정치권력이 국민을 부끄럽게 만들어놨지만, 국민이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며 부끄럽지 않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다시 뭉치고 있다.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이번 위기를 한국인들은 해학과 재치로 이겨내는 중이다. 한동안 패러디의 주 타깃은 대중문화였다. 방송과 영화, 출판 등의 콘텐츠가 패러디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제 패러디의 주된 대상은 대통령과 정부 여당, 정치 스캔들이 됐다. 대중문화 콘텐츠는 픽션과 상상력에 기반을 둔 것이지만, 지금 정치 이슈들은 우리 현실에 닥친 문제다. 픽션과 상상력이 현실의 재미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그 때문에 모든 콘텐츠 영역이 소비 냉각기를 맞았다.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것도 줄었고, 책 사는 것도 줄었다. 드라마도 시시해졌다. 토요일에 촛불집회 가는 게 가장 흥미롭고 신나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현상을 보며 한국인의 냄비근성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들의 목적은 뻔하다.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고 말하는 이들의 목적과도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히 어떤 나라가 돼야 하는지를 인식한다. 어느 때보다 더 적극적이고, 더 즐겁게 혁신을 요구하고, 그 흐름에 동참한다. 재미있는 일을 할 때는 창의력도 넘친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는 일에는 더 몰입되기 마련이다. 요즘 한국인들이 정치 패러디를 하며, 국정 농단에 대해 풍자와 재치로 맞서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열심히만 하는 사람은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을 결코 이기지 못한다. 재미있는데다 열심히 하기까지 하면 천하무적이다. 지금 광장에서 선 한국인들이 바로 그렇다.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trendhitchhiking@gmail.com

*TREND Insight & Business Creativity를 연구하는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이며, 저서로는 <라이프트렌드 2016: 그들의 은밀한 취향> <라이프 트렌드 2015: 가면을 쓴 사람들> <라이프 트렌드 2014: 그녀의 작은 사치> <완벽한 싱글> <라이프 트렌드 2013: 좀 놀아본 오빠들의 귀환> <트렌드 히치하이킹> 등이 있다.
#촛불집회#집회#촛불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