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희균]하얀 얼굴의 아이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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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초등학교에서 20년째 교편을 잡고 있는 김모 교사는 부임 첫해의 2학기 개학식을 잊지 못한다. 한 달 남짓한 여름방학을 지내고 돌아온 아이들의 얼굴이 어찌나 많이 변해 있었던지 몰라볼 지경이었다. 몇몇 아이는 김 교사가 얼굴을 붙잡고 “정말 ○○이 맞니?”라고 물어야 할 정도였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 너무 심하게 타서 얼룩덜룩 피부가 벗어진 팔과 다리, 훌쩍 큰 키를 보며 아이들이 산과 계곡에서 신나게 뛰어놀았을 시간을 떠올렸다.

17일 스무 번째 2학기 개학식을 맞은 김 교사는 “아이들의 얼굴이 너무 하얗다”고 말했다. 김 교사는 매년 여름방학이 끝날 때마다 아이들의 얼굴이 점점 더 하얘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특히 고학년을 맡은 해에는 아이들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창백하다고 했다.

이유는 다들 예상하는 대로다. 방학 시작과 동시에 학교 대신 학원으로 향하는 요즘 아이들은 좀처럼 햇빛 볼 일이 없다. 더구나 올해는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로 휴업을 한 만큼 방학이 짧아지는 바람에 더 오랜 시간 학원에 머문 아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여름방학 특강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운영되는 방학 과정들은 보통 과목마다 학습 진도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김 교사가 맡은 5학년 아이들의 여름방학 이야기를 모아보면 이렇다. 부모가 맞벌이를 하는 A 군은 오전에는 학교 돌봄교실에서 학원 숙제를 하고 점심을 먹은 뒤 학원 버스에 올라탄다. 내리 3시간 동안 영어와 수학 강의를 듣고 태권도 도장을 거쳐 집에 간다. 부모가 모처럼 정시 퇴근하는 날에는 세 식구 중에 A 군의 귀가 시간이 가장 늦다.

반에서 1, 2등을 하는 B 양은 월요일과 수요일은 종일 영어 학원에서 회화와 작문 공부를 하고, 화요일과 목요일은 사고력 수학 학원과 과학 실험 학원에 간다. 주말에는 국제중 진학을 준비하는 친구들과 특강을 듣거나 외국어 인증 시험을 본다. B 양은 지난 겨울방학에는 매일 국영수 학원에 다녔지만, 학원을 오가느라 길에서 버려지는 시간이 아깝다는 이유로 이번 여름방학에는 하루 종일 한 학원에 머무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택했다고 한다.

방학(放學)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 기간 수업을 쉬는 일 또는 그 기간’이다. 하지만 방학의 현실적 의미는 ‘학기 중에 못한 사교육을 몰아서 받는 기간’이 돼버렸다.

5, 6학년 아이들은 방학이 끝나면 삼삼오오 모여 중학교 1학년 수학 과정을 끝냈느니, 고등학교 영어 단어를 외웠느니 하는 이야기를 나눈다. 김 교사는 “선행학습이나 과도한 사교육을 하지 않겠다는 부모의 소신에 따라 방학 동안 실컷 논 아이들이 개학 이후에 주눅이 들거나 불안해하는 경우도 있다”면서 “저학년 때부터 이런 일이 반복되니까 고학년이 되면 아이들이 알아서 학원을 찾아간다”고 전했다.

안타까운 것은 방학을 사교육에 저당 잡히는 부모들의 마음도 십분 이해가 간다는 점이다. 청년실업률은 날로 높아지고, ‘3포 세대’라는 살벌한 말이 아무렇지 않게 나도는 마당에 미리미리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가는 나중에 후회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크다. 지금 당장 ‘하얀 얼굴’을 감수하고 사교육에 뛰어들어야 훗날 내 아이가 ‘하얀 손’, 즉 백수(白手)를 면할 것이란 인식이 팽배한 것이다. 유치원 방학 3주 동안 창의력 학원, 원어민 영어 회화, 수학 교구 방문 학습을 했다는 아이 친구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왠지 모르게 불안해진 나도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foryou@donga.com
#하얀 얼굴#학원#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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