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리포트]“죽어도 아이들과 죽겠다”… 제자들 먼저 챙긴 참스승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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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의인/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 생일날 제자들과 케이크 장난친 ‘남쌤’ ▼
학생들 대피시킨 남윤철 교사


점심 직후 나른한 5교시, 영어담당 남윤철 선생님이 칠판에 ‘while’이라고 쓰며 물었다.

“이 단어 무슨 뜻이지?”

“∼하는 동안요.”

“딱 선생님 단어네. 선생님도 동안(童顔)인데.”

남 선생님은 졸고 있는 제자를 깨울 때도 웃기려 공을 들였다. 출석을 부를 땐 이름 석 자만 읊고 넘어가진 않았다.

‘애들이 말장난을 만들어와 평가를 받고 간다. 그중 최우수작. 예수님이 제자와 쇼핑하다 맘에 드는 옷이 있어 하는 말… 예루살렘(얘로 살 거야라는 뜻).’(2011년 10월 페이스북 게시글)

남 선생님이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맡는 날 학생들은 평소보다 많이 남았다. 어느 땐 느닷없이 들어와 ‘1’을 외쳤다. 눈치 빠른 아이들이 ‘2’ ‘3’ 이어가면 주머니에서 떡을 꺼내줬다. 그의 생일날 학생들은 교단으로 몰려가 케이크 생크림을 그의 얼굴에 문질렀다. 그는 생크림 범벅인 채로 다시 제자들 얼굴을 비비는 스승이었다.

그는 수업시간 학생들 질문에 길게 답하는 편이었다. 단원고 2학년 A 양은 “남쌤은 항상 기본부터 설명해주셨다. 다른 선생님은 ‘다 알겠지’ 하고 건너뛰는 부분을 쌤은 지나치지 않았다”고 했다. 제자들 성적이 50점에서 55점으로 오르든, 80점에서 100점으로 오르든 그는 똑같이 말했다. “많이 올랐네.”

교실에서 그의 별명은 ‘송일국’이었다. 한 여학생은 그가 ‘○○아, 생일 축하한다. 요즘 영어공부 열심히 하던데 계속 열심히 하고 오늘 맛있는 거 많이 먹어’라고 써준 메모를 1년 넘게 지갑에 넣고 다녔다.

미혼의 아들을 떠나보내던 날 남 선생님의 어머니는 “의롭게 갔으니 됐다. 아이들 놔두고 살아나왔어도 못 견뎠을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학생들이 많이 희생돼) 아들 장례 치르는 것조차 미안하다”며 인터뷰를 사양했다. 남 선생님의 발인 직전 그의 아버지는 “사랑한다. 내 아들. 잘 가거라. 장하고 훌륭한 내 자식”이라고 다 들리게 말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엄하지만 맞장구 잘 쳐주던 ‘왕언니’ ▼
아이들 먼저 내보낸 최혜정 교사


지난해 단원고에서 교사로 첫발을 내디딘 최혜정 선생님은 올해 담임을 맡은 2학년 9반 학생들과 일곱 살 차였다. 아이들이 다른 선생님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으면 “네 입장에선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고 공감해주는 ‘왕언니’ 같은 교사였다. 최 선생님의 교무일지에는 제자들의 가정형편이나 말할 때 특징 같은 것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부임하자마자 카메라를 장만해 틈나는 대로 제자들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의 카카오스토리에는 학생들 사진이 많이 올라와 있다.

최 선생님은 야간 자율학습 때 휴대전화를 만지는 아이들을 보면 불쑥 다가가 ‘핸드폰!’ 하고 인상을 쓰며 엄하게 보이려 했다. 하지만 친구들한테는 “내가 어린 걸 알면 무시할까 봐 나이는 비밀로 하는 중”이라고 털어놓았다. 강한 척해도 속이 여리다며 친구들은 그를 ‘외강내유(外剛內柔)형’이라고 놀렸다.

생일이었던 지난해 11월 26일 한 제자가 그에게 편지를 건넸다. ‘제 생일 때 주신 핸드크림 잘 쓰고 있어요. 나이 차가 별로 안 나 편한 것 같아요. 선생님, 학기 마지막 날엔 나이 알려주세요!’

최 선생님은 맞벌이하는 부모 대신에 두 동생 아침밥을 챙겨주는 맏이였다. 동생들 진학 상담도 전담했다. 사촌동생들에게도 대입 자기소개서를 보내라고 해 일일이 첨삭했다. 고모에게는 뱃살을 만지며 ‘언제 뺄 거냐’고 농담을 하고, 삼촌이 담배를 피우면 엉덩이를 툭 차며 ‘내가 끊으라고 했지’ 하고 너스레를 떨던 조카였다. 아버지 최재규 씨(53)는 “학교 다닐 때 용돈 30만 원을 주면 5만 원은 저축하고 돈을 남겨서 나한테 등산 장비를 사주곤 했다”고 말했다.

최 선생님은 집에서 부모와 복분자주 마시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아버지 최 씨는 지난달 전북 고창에 놀러갔다가 딸이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면 함께 마시려 특산품인 복분자주를 여러 병 사왔다. 이 복분자주는 지난달 19일 고인의 빈소 영정 옆에 놓여 있었다.

임현석 기자 ihs@donga.com

▼ 학교에선 ‘딸바보’… 집에선 ‘제자바보’ ▼
선실 다시 내려간 박육근 교사


8일 밤 12시 박육근 선생님의 빈소에 20대 청년이 한쪽 다리를 절며 들어왔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박 선생님의 제자였다. 장애가 있었던 이 제자는 영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 돼 찾아오면 웃으며 맞아준다고 하셨잖아요. 저한테 ‘선생님이 되라’고 먼저 말씀하셔 놓고 약속을 깨면 어떡해요.”

몸집이 큰 한 제자도 영정 앞에서 입을 열었다. 용인대 태권도 선수였다.

“선생님 저 경기 있어서 공항 가는 길이에요. 선생님 아니었으면 제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을까요.”

학교에서 싸움을 자주 했던 이 제자는 박 선생님의 조언으로 태권도를 시작했다고 했다.

제자들은 토요일 오후 운동장에서 박 선생님과 축구 했던 추억을 많이 떠올렸다. 말썽부린 아이들에게 박 선생님이 내건 벌칙은 ‘토요일에 나랑 공차기’였다. 학생부장을 오래 맡아 사달이 나면 경찰서에 달려가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한 학부모는 “선생님이 학교폭력 대책 회의 건으로 저한테 전화할 때마다 ‘죄송하다’며 몸을 낮추셨던 게 기억난다”고 했다.

박 선생님의 친형 박춘근 씨(61)는 “육근이가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시골에서 어렵게 성장해 넉넉지 않은 집 아이들을 많이 챙겼다. 사고 친 애들 직접 합의해 준 적이 몇 번 있었다”고 했다. 한 단원고 학생은 “선생님이 형편이 어려운 친구에게 ‘돈 안 내도 수학여행 갈 수 있으니 걱정마라’고 여러 번 말했다”고 전했다.

집에서 박 선생님은 두 딸에게 ‘서운하다’는 불평을 듣는 아버지였다. 아내는 “학생들한테 하는 만큼만 애들한테 해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박 선생님은 ‘딸 바보’로 통했다. 학생들 앞에서 “우리 둘째딸이 너희들과 동갑인데…”란 말을 습관처럼 했다. 단원고 2학년 A 양은 “처음에는 공부 열심히 하라는 취지로 딸 얘기를 꺼냈다가 결국 매번 딸 자랑으로 끝났다”고 말했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
#세월호 참사#세월호 의인#단원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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