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술 더 뜬 기관장, 선장지시 없이 부하 6명에 퇴선 명령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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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침몰/그날 선원들은]
브리지서 기관실에 비상전화, 선실서 쉬고있던 직원들도 밖으로
복도에 모여있다 자기들만 탈출… 승객 구조-기관실 수호 임무 어겨

세월호의 동력인 엔진을 책임지는 기관장 박기호 씨(58·체포)를 포함한 기관부 선원 7명은 배가 기울기 시작한 직후 기관실을 버리고 몸을 피해 따로 모여 있다가 자기들만 아는 통로를 이용해 집단 탈출했다. 배를 버려야 하는 퇴선 상황에서 기관실을 총지휘하도록 돼 있는 기관장이 앞장서서 근무지 이탈을 지시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기관부 선원 4명과 조타수 2명의 증언, 해경 조사 내용을 토대로 기관사들의 탈출 행적을 재구성했다.

해경에 따르면 기관장 박 씨는 16일 오전 8시 48분 세월호가 급하게 오른쪽으로 변침하던 순간 3등 항해사 박한결 씨(26·여·구속), 조타수 조준기 씨(56·구속)와 함께 브리지(선교)에 있었다. 기관장 박 씨는 배가 왼쪽으로 점점 기울어가자 브리지에 있는 비상 직통전화로 기관실 근무 선원에게 전화해 탈출을 지시했다. 박 씨는 이날 오전 8시 30분부터 해로가 좁은 지역을 통과하고 있어 엔진을 조종하기 위해서 브리지에 올라와 있었다. 박 씨가 탈출 지시 전화를 하는 순간 브리지에 들어왔던 조타수들은 “기관장이 선장 지시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탈출 명령을 내려 황당했다”고 말했다.

배가 우현 선회하고 박 씨가 전화로 탈출 지시를 하기 전에 기관실에서 근무하고 있던 3기관사 이모 씨(26·여)가 브리지로 올라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타수들은 “브리지에 들어갔을 때 기관실에 있어야 할 이 씨가 있어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입을 모았다. 조타수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기관장이 브리지에 올라온 상황에서 항해사가 우현 선회를 하자 배가 기울었고, 기관실에 있던 이 씨가 배의 움직임에 당황해 브리지로 올라온 것으로 보인다.

기관부 선원 7명은 배가 기울고 있을 때 선원전용 계단을 통해 기관부 선실 복도에 모여 집단 탈출을 도모했다. 기관장 박 씨와 3기관사 이 씨는 탈출 지시 전화 직후 브리지를 나가 기관부 선실로 내려갔다. 기관실에서 근무하던 이모 씨(56)와 박모 씨(59)도 기관장의 탈출 지시 전화를 받고 선실로 올라왔다. 선실에서 쉬고 있던 1기관사 손모 씨(58)와 조기장 전모 씨(56), 조기수 김모 씨(62)도 복도로 나왔다. 김 씨는 “자다가 굴러 떨어져 치아가 부러지고 팔도 다칠 만큼 갑자기 배가 기울어 복도로 나왔더니 동료들이 왔다”고 말했다.

기관장과 기관사들이 사고 직후 모인 기관부 선실은 3층(B데크) 선미 쪽에 있다. 같은 층 선수 쪽에 있는 식당과 노래방 등 승객용 시설과 거의 격리돼 있어 일반 승객이 접근하기 어려운 공간이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공간인 선실 복도에 모여 30∼40분 동안 퇴선 명령 방송만을 기다렸다. 배가 위험에 빠지면 기관장 지휘 아래 기관부 선원이 배 좌우에 있는 구명벌을 바다에 투하하고 비상 사다리에 공기미끄럼틀(슈트)을 설치해 승객의 탈출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지만 아예 무시한 것이다.

1기관사, 모텔 객실서 자살 기도

1기관사 손 씨는 21일 오전 11시 40분경 전남 목포시 죽교동 모텔 3층 객실에 비치된 비상탈출용 밧줄로 목을 매려고 시도하다 모텔 직원에게 제지당했다. 손 씨는 소주를 마시던 중 3기관사 이 씨가 찾아오자 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잠갔다. 손 씨가 문을 열어주지 않자 이 씨는 1층으로 내려가 모텔 직원에게 “(손 씨가) 자살하려고 한다. 예비키로 방문을 열어 달라”고 요청했다. 모텔 직원이 경찰에 신고한 뒤 방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손 씨가 밧줄을 동그랗게 말아 자살을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손 씨가 승객을 버리고 탈출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동료들까지 연이어 체포되자 자살을 기도한 것으로 보인다”며 “심리 치료가 필요해 보여 병원 치료를 받게 했다”고 말했다.

이 모텔에는 손 씨와 이 씨뿐 아니라 기관장 박 씨, 1등 항해사 신정훈 씨(34·체포), 2등항해사 김영호 씨(47·체포), 조기수 박모 씨(59)와 이모 씨(58) 등 선원 7명이 함께 한 층에 머물고 있었다. 기관장 박 씨의 방 쓰레기통에서는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 관계자로 보이는 직함과 전화번호 3개가 적힌 메모지가 구겨진 채 발견됐다. 해경 조사 중에도 회사 측과 긴밀히 연락하며 상의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19일 오전 3시 50분에 편의점에서 2만6200원어치 먹을거리를 산 영수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이 모텔에 함께 묵으며 조사에 대비해온 것으로 보인다. 영수증 뒷면에는 “새벽까지 조사 끝나고 숙소로 귀가 후 기”라고만 적혀 있었다.

목포=조동주 djc@donga.com·여인선 기자
#기관장#선장#세월호 침몰#퇴선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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