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몰]“함께 뛰놀던 동네 친구들이… 이젠 샤워하기조차 겁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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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주민 패닉]

살아남은 자에게도 지금 이 순간은 지옥이다.

눈을 감으면 배 안에서 ‘살려 달라’고 외치던 친구의 얼굴이 생각난다. 지난주까지 운동장에서 함께 농구를 했던 선배의 땀 냄새가 지금도 생생하다. 실종 학생들과 일면식도 없는 동네 주민도 하루 종일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뛰는데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세월호 침몰 이후 실종자 가족은 물론 경기 안산 단원고 학생과 주변의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선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S)의 전형적 증상인 극도의 긴장감과 불안, 자책감과 분노, 무기력증과 공포 등이 나타나고 있다. 본보 취재팀은 사고 직후 5일 동안 안산시내 병동, 장례식장, 상점, 거리 등에서 만난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와 행동 특성을 전문가와 함께 분석했다.

○ 극도의 긴장감과 불안


사고를 직접 경험한 생존 학생들의 긴장감과 불안감은 극에 달해 있다. 고려대 안산병원은 생존한 입원환자 76명 중 55명의 스트레스 지수를 검사한 결과 평균 8점에 육박했다. 스트레스 정도는 0점에서 시작해 10점에 가까울수록 심각한 상태로 판정되며 8점은 중증에 해당한다. 입원 중인 한모 군(17)은 “눈을 감으면 선생님이 숨지기 직전의 모습, 친구들이 입술이 파래진 채 벌벌 떨던 모습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병원 측은 “사고 후유증으로 잠을 못 자고 식사를 못 하는 학생들에게 약물치료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극도의 긴장감과 불안은 대개 식욕 감퇴와 불면증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사고를 당하지 않은 학생들이나 일반 시민에게도 극도의 불안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주말인 19일 안산 시내 장례식장에서 만난 학생들은 “혼자 자는 것도 무섭다”며 “친구들이 대부분 그렇다”고 말했다. 울다 탈진해 응급실로 실려 간 학생도 있다. 안산 시민 김모 씨(48)는 매일 오전 5시가 되면 물에서 허우적대는 느낌에 깬다. 그는 “같은 사고를 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데도 워낙 충격적이라 마치 내 일같이 느껴진다”며 “중년 남자가 혼자 샤워하는 것에서조차 공포를 느낀다는 것을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라고 말했다.

대전소방서에서 근무하는 PTSS 전문가 김봉명 팀장은 “언제든 이 사고가 자신한테 닥칠 수 있다는 극도의 불안감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 자책감과 증오


PTSS의 또 다른 증상은 ‘분노’다. 이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면 ‘죄책감’, 남에게 표출되면 ‘증오’로 이어진다. 김 팀장은 “18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교감 선생님의 사례가 ‘죄책감’으로 인한 극단적 선택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실종 학생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단원고 선후배들의 걱정과 무기력감은 죄책감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사망자 정모 군(17)과 친했다는 A 군(16)은 사고 후 말수가 급격히 줄고, 하루 종일 TV만 보고 있다. A 군의 부모는 “주말마다 함께 운동을 하던 형의 이름을 사망자 명단에서 보더니 처음엔 충격을 받았고, 이후 말이 없어지며 TV만 보고 있다”고 말했다.

타인에 대한 분노도 극에 달했다. 선장이 먼저 대피하고, 사고 이후 정부의 대응이 혼란에 빠진 것 등이 중첩되면서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모두가 우리를 피해자로 만들고 있다”는 증오감이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박주언 계요병원 원장은 “남에 대한 분노와 나에 대한 분노는 ‘종이 한 장 차이’”라며 “극도의 분노증세를 보이는 학생들은 죄책감을 더 깊이 느끼고 있는 경우가 많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 ‘단순 위로’ 상담은 무용지물…장기치료 필요


20일 안산시 고잔동의 한 커피숍에선 주부 셋이 모여 ‘단원고 학생’ 이야기를 꺼냈다. 커피숍 주인은 테이블 쪽을 쳐다보며 “내 주변에 애 잃은 부모를 아는 사람들이 많다”며 “나도 며칠 아이가 걱정돼 하굣길에 태우러 갔다. 항상 불안하다”고 말했다. 채정호 서울성모병원 정신의학과 교수는 “여기저기서 치유 프로그램에 참가하겠다고 하지만, PTSS는 일반 상담치료와 달리 사고 상황과 환자 개개인의 상태를 고려한 정밀 처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힘들었지?”라는 수준의 상담으로는 증상을 완화시킬 수 없다고 지적한다. PTSS 증상이 있다는 것을 해당 환자에게 주지시킨 뒤 이를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최소 1년 동안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장기 치료를 위해선 정부가 PTSS 전문치료센터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전쟁으로 인한 PTSS 호소 환자가 많은 미국에서는 PTSS를 전담하는 의료기관을 세워 참전자 등 트라우마 치료가 필요한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Post Traumatic Stress Syndrome·PTSS) ::

전쟁 고문 자연재해 사고 등으로 입은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트라우마(trauma)라고 한다. PTSS는 트라우마가 직접적 원인이 된 일련의 정신질환군(群)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보다 폭넓은 개념이다. 트라우마를 입었던 당시의 기억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며 공포에 시달리고 우울증 공황장애 알코올사용장애 등을 동반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큰 지장을 준다.

안산=김수연 sykim@donga.com·김성모·서동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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