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직된 노동시장-갈팡질팡 정책… 한국 ‘투자의 사막’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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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자본 떠나고 국내기업도 이탈

외국자본 떠나고 국내기업도 이탈
《 산업화 과정에서 고도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기업 투자가 꽁꽁 얼어붙고 있다. 각종 규제와 투자환경 악화로 국내에 들어오는 외국인 투자는 정체되고, 해외로 빠져나가는 국내 기업들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고 있다. 기업들은 “투자하는 분은 업고 다녀야 한다”는 대통령의 구애에도 불구하고 향후 경기의 불확실성을 우려하며 투자 결정을 미루고 있다. 》  
#1 올 5월 정부는 ‘1차 투자 활성화 대책’을 통해 “지주회사 규제를 완화해 국내 기업과 일본 기업의 공장 합작투자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지주회사의 손자회사는 증손회사 지분을 100% 보유해야 한다’는 현행 규제를 바꿔주면 당장 2조3000억 원대의 신규 투자를 일으킬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관련 법안은 “대기업 특혜”라는 야권의 반발로 아직도 국회 통과가 지연되고 있다. 해당 기업들은 “이러다가 일본 측에서 먼저 투자 의사를 접을지도 모른다”며 불안해하고 있다.

#2 삼성전자는 올 한 해 사상 최대 규모인 24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경기침체에도 좋은 실적을 이어가는 데 자신감을 얻고 보다 공격적인 경영전략을 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삼성전자의 투자처는 국내보다는 미국 중국 베트남 등 해외에 몰려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 기업이 아무리 사상 최대의 이익을 내고 투자를 해도 국내 경제에 주는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한다.

○ 정부의 총력전에도 좀처럼 늘지 않는 투자

기업 투자는 어느 정권이든 집권 첫해에는 늘어나는 게 일반적이다. 새 정부는 보통 국정 주도권을 잡기 위해 경제 회복에 힘쓰는 데다 정부 출범과 동시에 정책 방향에 대한 불확실성도 어느 정도 걷히기 때문이다. 현 정부도 기업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벌써 세 차례에 걸쳐 맞춤형 규제 완화 대책을 내고 그룹 총수들을 청와대로 초청하는 등 갖은 노력을 했다. 앞으로 정부가 경제 활성화에 전념하겠다는 신호를 확실히 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기업들의 투자는 기대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기업 설비투자 규모는 지난해 5월부터 올 7월까지 15개월 연속 감소세(전년 동월 대비)를 보였다. 정부 관계자는 “역대 정부 통틀어 이렇게 기업 투자를 위해 노력한 적이 없는데 막상 지표를 보면 답답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투자 부진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한국은행의 올해 설비투자 증가율 전망치도 1.8%(7월)에서 ―1.2%(10월)로 불과 석 달 만에 3%포인트나 하향 조정됐다.

외국 기업 투자도 부진하기는 마찬가지다. 2004년 90억 달러를 넘었던 외국인 직접투자(FDI)는 지난해 50억 달러로 거의 ‘반토막’이 났다. 가장 큰 이유는 투자환경의 악화다. 경직된 노동시장, 강성 노조, 반(反)외자 정서와 정치권의 규제 입법 등이 국내 기업의 투자를 저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외국 기업의 한국 진출도 막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은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 때부터 투자의 중요성을 부쩍 강조해왔지만 실제는 정국 상황에 따라 경제 정책이 좌우로 갈팡질팡해 왔고 이는 현 정부에 와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통상임금 문제나 화학물질관리법 등 기업의 존립을 좌우하는 규제가 별다른 예고 없이 튀어나오는 것도 외국 기업들을 밖으로 내모는 요소다.

세계경제포럼(WEF)의 국가경쟁력 순위에서도 한국은 △정부 규제 부담(95위) △노사 간 협력(132위) 등 기업 투자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 대체로 하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 정부 “내년 초부터 조금씩 살아날 것”

기업 투자 부진의 원인을 보다 구조적인 문제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정부나 정치권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변의 경제 여건이 기업들의 투자 의지를 꺾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김창배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투자 둔화의 요인은 미국 중국 등 주요국이 제조업을 강화하며 내수 중심의 경제로 전환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현금만 쌓아놓고 투자를 안 한다고 나무라는데 기업으로서는 한 번의 투자 실패가 기업의 존폐를 좌우할 수 있는 만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도 “돈이 된다면 기업은 투자하게 돼 있는데 지금 돈을 벌 만한 아이템이 부족하다”며 “경제가 활력을 잃기 전에 벤처·중소기업을 육성하고 새 성장동력을 찾는 방법밖에 없다”고 조언했다.

외국인 투자 유치가 부진한 것에 대해서는 과거보다 한국의 투자매력이 떨어졌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동열 현대경제연구원 기업정책연구실장은 “한국은 인건비가 싼 것도 아니고 시장도 크지 않은 만큼 중국 등 주변국보다 경쟁력이 낮다”며 “외국인 학교나 병원 등 정주 여건 개선을 위해 획기적인 규제 완화를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정책효과의 시차를 고려하면 늦어도 내년 상반기면 투자 회복이 가시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당국자는 “아직은 경기에 대한 확신은 덜하지만 경제단체들을 만나 봐도 조금씩은 투자심리가 살아나고 있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세종=유재동·송충현 기자 jarrett@donga.com  
▼ 사회주의 중국도 서비스 규제 푸는데… ▼
■ 한국 경제자유구역 꽉 막힌 규제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이 서비스 분야에서 과감한 규제 완화를 추진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8일 열린 제22차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중국 상하이 자유무역시범구의 서비스 규제 완화를 언급하며 이같이 강조했다. 서비스 규제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 국내 현실에 대한 답답함이 담겨 있는 말이었다. 전문가들은 매년 확대되는 투자 불균형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서비스업 규제를 획기적으로 완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한국의 서비스 규제는 여전히 10년 전과 똑같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이 과감하게 규제를 푸는 것을 보면 한국의 현실은 부끄러울 정도다. 중국은 지난달 29일 상하이에 중국 최초의 자유무역시범구를 출범시켰다. 중국 마카오(26.8km²)보다 넓은 28.8km²의 지역에 금융 의료 교육 등 서비스업 규제를 대폭 풀었다. 이 지역에서는 외국 자본이 영리 목적의 교육기관을 중국 측과 합작으로 세울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전까지 외국 자본은 비영리 목적의 교육기관만 설립할 수 있었다. 병원은 아예 외국 자본이 단독으로 지을 수 있게 했다. 이전까지 외국 자본이 중국에서 의료기관을 설립하려면 중국 측과 합작하는 것이 필수 조건이었다.

중국이 이처럼 적극적으로 규제를 없앤 것은 새로운 경제발전 모델을 실험하기 위해서다. 1978년 개혁개방 이후 법인세 감면 등 인센티브를 주고 외국 제조업체를 끌어들이던 기존 외자유치 방식 대신 규제 완화를 통해 서비스업을 육성하겠다는 구상이다. 중국은 이번 ‘실험’이 성공할 경우 자유무역지대를 향후 서울 면적의 2배에 이르는 상하이 푸둥 지역(약 1210km²) 전체로 확대할 계획이다.

반면 한국은 2003년 인천경제자유구역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8곳의 경제자유구역을 지정했지만 대부분 ‘허허벌판’ 수준이다. 경제자유구역을 지정한 지 10년이 됐지만 경제자유구역이 2003년부터 작년 말까지 유치한 외국 자본은 67억8000만 달러(약 7조2546억 원)에 그쳤다. 같은 기간 국내에 들어온 외자의 6%에 불과한 것이다.

정부는 2002년 제정한 경제자유구역법에 외국인이 경제자유구역에 투자개방형 병원을 지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근거를 만들었지만 작년 말에야 병원 내 외국면허소지자 비율, 병원 허가 절차 등 세부 내용이 만들어졌다.

오정근 고려대 교수(경제학과)는 “중국 상하이는 2015년까지 병원 학교 등의 모든 규제를 풀어 국제금융도시를 완성할 계획”이라며 “한국 내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까지 중국에 뒤처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세종=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투자환경#경기 불확실성#투자활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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