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해제 MB5년]<6>‘형님 前上書’ 배달 미스터리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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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께 공천 어렵다 말씀 드려보라” 말은 했지만…

이상득(SD) 부의장이 2008년 3월 24일 경북 포항시청에서 열린 ‘도민체전 서포터스 발대식 및 필승 결의대회’에 들어서며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그는 18대 총선 출마 의사를 거듭 확인했다. 역대 대선 최다인 531만 표 차로 대통령에 오른 MB에게 SD는 여전히 어려운 형이었다. 동아일보DB
이상득(SD) 부의장이 2008년 3월 24일 경북 포항시청에서 열린 ‘도민체전 서포터스 발대식 및 필승 결의대회’에 들어서며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그는 18대 총선 출마 의사를 거듭 확인했다. 역대 대선 최다인 531만 표 차로 대통령에 오른 MB에게 SD는 여전히 어려운 형이었다. 동아일보DB
“내게 생각이 있으니 기다려 봐….”

2008년 2월 말 청와대 내 대통령 관저. 이명박 대통령(MB)은 함께 밥을 먹던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에게 넌지시 이렇게 말했다. 정두언은 4월 18대 총선에서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SD)에게 공천을 주면 압승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직전 대선에서 사상 최대인 531만7708표 차로 승리한 직후 치르는 총선인 만큼 여권에선 내심 개헌 선(200석)을 기대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적어도 180석은 건지지 않겠느냐는 말이 공공연히 나올 정도였다. 아무튼 대통령이 그렇게 얘기하자 정두언은 MB가 어떤 식으로든 친형인 SD에게 불출마를 권유할 것으로 보고 더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청와대 내 비서동. 류우익 대통령실장, 박재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김두우 정무2비서관 등도 SD 공천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박재완=“부의장님에게 공천을 주면 총선 판세가 어렵게 됩니다. 대통령님께 어떤 식으로든 말씀드려야 합니다.”

류우익=“하, 형님 일인데 이걸 어떻게 말씀드리나…. 박 수석이 정무수석이니까 한번 말씀드려 보세요.”

박재완은 그날 밤 청와대 본관으로 MB를 찾아갔다. 박재완은 류우익에게 했던 것처럼 MB에게 ‘SD 공천 불가’를 건의했다. 잠시 머뭇거린 MB는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박재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럼 한번 말씀 드려 봐.”

메시지가 분명치는 않았지만 박재완은 이를 MB의 ‘오케이 사인’으로 받아들였다. 정두언에게도 이 소식은 들어갔다. 정두언은 류우익과 박영준에게 인사 작업권을 내준 뒤 힘이 빠졌지만 여전히 청와대에 ‘안테나’를 갖고 있었다. 그는 MB가 자신에게 한 말을 지키려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방법이 문제였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일이었다. 박재완은 장다사로 대통령정무1비서관, 김두우 등과 회의를 열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장다사로를 쳐다봤다. 국회부의장 시절 SD의 비서실장을 지낸 그였다.

장다사로도 피하진 않았다. 전화를 몇 군데 돌려 보니 SD는 마침 지역구(경북 포항남-울릉) 사무실이 있는 포항에 내려가 있었다. 그런데 SD 지지자들이 며칠 전부터 사무실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정치권에서 일고 있는 ‘SD 공천 불가론’을 접하고 서울에서 내려올지 모르는 불청객과 SD의 만남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인(人)의 장막’이었다. 장다사로가 SD를 직통 휴대전화로 찾았지만 불통이었다. 지지자들이 SD 휴대전화까지 확보했기 때문이다. 장다사로는 난감했다.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MB의 메시지가 있었다고 하니 전달은 해야 했다. 결국 장다사로는 SD 주변 인사들을 통해 박재완이 들고 온 MB의 메시지를 어렵사리 전하긴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며칠 뒤인 2월 29일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회는 SD의 공천을 발표했다. SD 공천 소식을 접한 정두언 등 당 내 소장파 그룹은 흥분했다. 특히 MB가 정두언을 통해 밝혔다는 ‘내게 생각이 있다’는 말의 진정성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MB가 ‘SD 공천 불가’에 동의한 것인지, 그랬다면 그 메시지를 정치적으로 책임 있는 라인을 통해 SD에게 제대로 전달했는지….

당은 들끓었지만 청와대 참모들은 ‘2·29 SD 공천 확정’ 이후 더는 거론하지 못했다. 박재완의 증언. “SD 공천 문제를 꺼낸 것도 조심스러웠는데 당이 최종 공천을 한 마당에 어떻게 더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과 SD의 관계를 다들 아는데….”

청와대 상황과 달리 한나라당 분위기는 악화되고 있었다. 특히 김무성 유기준 등 영남권 친박 의원들이 대거 공천에서 탈락하는 이른바 ‘친박 학살’까지 벌어지면서 얼마 전까진 당연시되던 ‘180석+α’ 목표가 흔들리고 있었다. 조각 과정에서 류우익, 박영준, 그리고 SD에게 주도권을 뺏긴 뒤 총선 판세까지 흔들리자 소장파는 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자연스레 SD 불출마론이 다시 거론됐다. 판세 전환과 SD계 타격을 동시에 노린 다목적 카드였다. 하지만 말뿐, 아직 별다른 액션 플랜은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른 뒤인 3월 20일 오후. 3선의 남경필이 단신으로 포항행 고속도로를 탔다. SD와 담판을 짓기 위해서였다. “다치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심정이었다. 대부분의 소장파는 남경필의 포항행을 돌출 행동으로 여겼다. 하지만 남경필은 자기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SD와는 이야기가 될 걸로 믿었기 때문이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후폭풍으로 당이 뿌리째 흔들릴 때 박근혜 대표 체제를 세우고 천막당사로 옮기는 작업을 함께 했기 때문. SD는 당시 사무총장이었고, 남경필은 원희룡 등 다른 소장파와 함께 박근혜를 전폭 지원했다. 남경필은 이후 SD와 종종 해외 출장도 함께 가는 사이가 됐고 2007년 대선 경선 때는 MB 진영에도 합류했다.

저녁 무렵 도착한 포항 사무실에 SD는 없었다. 3시간 정도 기다리니 SD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남경필을 보더니 사무실 안쪽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SD=“출마하지 말라고?”

남=“네, 부의장님.”

SD=“누구랑 이야기하고 왔어?”

남=“저 혼자 온 겁니다.”

SD=“그래? 그렇다면 그만 못 두지….”

1시간 넘는 대화에도 SD 설득에 실패한 남경필은 인근 영덕대게 집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하며 SD의 말을 곰곰이 되새겨 봤다. 특히 대뜸 자신의 배후를 캐물은 대목이 신경 쓰였다. 남경필은 결국 SD가 MB의 생각을 궁금해 했음을 깨달았다. 얼마 전 MB가 박재완과 장다사로 등을 통해 자신에게 불출마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는 소문은 알고 있을 터였다. 남경필의 증언. “내가 정두언이나 이재오와 상의했다면 SD는 물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출마 의지를 흔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바로 MB의 의지가 담겼는지를 알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 사이 혹 생각이 달라졌나 해서 말이다.”

하지만 남경필 뒤에 MB는 없었고, 동생의 의중을 확신하게 된 SD는 이후 거칠 게 없었다.

남경필이 SD와 만난 다음 날 기자회견을 열고 SD의 불출마를 종용해도, 정두언 등 소장파 55인이 집단 기자회견에서 SD 불출마를 주장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SD와 동반 불출마하겠다고 ‘55인’에게 호언장담했던 이재오는 청와대 인근 안가에서 MB를 만나 SD에 대한 마음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SD 불출마설은 없던 일”이라며 자신의 지역구에서 조용히 표밭을 갈았다. 상황을 정리한 SD는 3월 25일 “(55인은) 충정에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대통령 친인척으로 몸 관리와 처신을 철저히 하겠다”며 총선 출마 의사를 재확인했다.

박희태, 김무성 등 중진들이 줄줄이 낙천한 가운데 SD를 공천한 한나라당은 결국 2008년 4월 18대 총선에서 예상보다 적은 151석을 얻는 데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SD에게는 대승이었다. 여권의 3대 축 중 정두언은 MB와 멀어지고 있었고, 이재오는 낙선의 고배를 마시면서 한나라당은 총선 후 급속히 SD 중심으로 재편됐기 때문이다. “몸조심을 하겠다”던 SD는 총선 후 대낮에도 종종 청와대 인근 음식점을 찾았다. 한번은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길에서 마주쳤다.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기자들=“부의장님, 여기까지 무슨 일이세요?”

SD=“왜, 내가 못 올 곳 왔나?”

SD가 불출마를 선언했다면 한나라당 의석 수가 어떻게 변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SD 공천 여부에 대한 MB의 모호한 메시지가 여권의 총선 전략에 적지 않은 혼선을 초래한 것은 분명하다. MB는 총선 후에도 SD 이야기만 나오면 주로 이렇게 세 마디로 무마했다고 한다.

“내가 안다.” “걱정 마라.” “내가 정리하마.”

어릴 적부터 어려워했고 심지어 경외의 대상이던 친형 SD. 특유의 업무 추진력으로 불도저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MB도 유독 SD 문제 앞에서는 ‘햄릿’이었다. 그리고 MB의 이 같은 태도는 SD를 ‘만사형통(萬事兄通)’으로 불리게 한 정치적 토양이 되고 있었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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